brunch

그래서 살맛 나는 세상(하)

by 이은호



고등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동기 열 명이 동창회장님 회사에 입사하였다. 일주일간 인사부서에서 주관하는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한 명씩 발령받은 부서로 팔려가던 날,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그분을 만났다. 훤칠한 키에 시원한 외모의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와 나를 찾았다. '이은호 씨, 나하고 같이 갑시다.' 난 그분의 멋진 모습에 심쿵하여 멋대로 나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내가 배치받은 곳, 기획부 기획과. 그리고 그분은 바로 나의 선임이었다. 그분과의 만남이 운명이랄까, 내가 전례를 깨고 고졸 신분으로 기획실에 입사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부서 배치 후 첫 회식자리에서 이사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은호가 입사동기들 중 아이큐가 제일 높더라고. 그래서 내가 옆에 두고 감시하기로 했지. 머리 좋은 애를 현업에 두면 사고 칠 수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 은호야, 너 조심해야 한다. 내가 널 딱 보고 있다는 걸 명심해라.' '예.' 칭찬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에 난 괜히 얼굴이 빨개져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나의 선임은 S대를 나온 좋은 머리에 외모까지 갖춘 넘사벽 같은 분이었다. 다들 학벌이 쟁쟁한 기획실 직원들 사이에서 유일한 첫 남자 고졸사원인 나. 게다가 첫 사회생활이었다. 그런 여건에서 잔뜩 주눅 들어 있는 나를 그분이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그분은 실력도 있었지만 소탈한 성격에 매사에 솔선수범 하는 행동으로 회사 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였다. '현장에 답이 있다'며 수시로 나를 데리고 현장으로 가서 공정흐름과 제품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분은 업무의 맥을 아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걸 나에게 가르쳐 주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분은 나에게 업무만 가르쳐준 게 아니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야간대학에 다니는 나에게 정말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오후 네시만 되면 여유 있게 학교에 가서 수업준비 하라고 성화를 댔고, 시험기간 때는 근무시간임에도 회의실에 밀어 넣고 시험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학교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는 대학시절의 낭만인데 그런데 빠지면 안 된다고 대낮부터 나를 사무실에서 내보냈다. 물론 회사일이 바쁠 때는 학교수업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함께 철야근무도 했지만, 그분 덕분에 나는 정말 편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는 내가 행여라도 휴일에 심심할까 봐, '은호 씨, 요번 일요일에 뭐 하지?' 하며 불러내 테니스도 가르쳐 주고, 함께 당구장에도 가고, 영화도 봤다. 휴대폰이 없는 시절이어서 내 친구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하곤 했는데, 그분은 내 친한 친구들 이름까지 외울 정도였다. 먼저 전화를 받게 되면 꼭 아는 체하며 안부를 묻고 나서 나에게 전화를 넘겨주었다. 그래서 내 친구들도 그분을 잘 알았고 모두들 좋아하였다. 그렇게 늘 나를 챙겨주고 회사에서건 밖에서건 같이 붙어 다니니까, 사람들로부터 '둘이 사귀냐?' '친형제간이냐?' 하는 농담을 들을 정도였다. 이사님께서도 그분이 안 보이면, '은호야, 네 형 어디 갔냐?'라며 나에게 물어보셨다.


수습기간이 끝난 후 기획과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예산관리였다. 각 부서별로 할당된 예산 집행을 관리하는 업무였는데, 부서별 예산담당자인 여직원들과 업무적으로 접촉이 많았다. 업무를 잘 모르는 여직원들에게는 선임이 나에게 베푼 것처럼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했는데, 그게 예상치 못한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어떤 여직원은 업무가 끝난 후에도 내 옆에 붙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기도 하고, 어떤 여직원은 친구들과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을 잔뜩 들고 와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라며 결국 자신의 독사진 두장을 놓고 가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여직원이 내게 주의를 주었다. '은호 씨, 여직원들에게 잘해주지 마세요. 그러면 자기를 좋아하는 줄 오해한단 말이에요.' 그런가? 난 남자 여자를 떠나 친절하게 대해주고 상대방이 잘 모르는 걸 가르쳐주려고 했을 뿐인데, 그게 오해살 일이라는 걸 몰랐다. 몇 번 주의를 받은 후 나는 여직원들을 아주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충고를 한 같은 사무실 여직원이 사실은 그 당시 나와 사귀고 있던 아내의 친구였다. 그렇게 나는 아내 친구의 감시 속에 다른 여직원들에게는 목석같은 남자로 행세하여야만 했다.


내 선임과의 인연은 두 번째 회사로 이어졌다. 회사에 사정이 생겨 그분이 먼저 이직하였고, 몇 년이 흐른 뒤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분의 뒤를 따랐다. 그분이 옮긴 회사에 바로 그분 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곳 사무실 동료들도 다 좋은 분들인 데다 그분의 든든한 후원도 있어, 새로 적응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마치 원래 그 회사에 있었던 사람인 양 곧 조직에 동화될 수 있었다.


그분은 학부 전공이 물리학임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회계공부를 하여 회사의 원가계산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역시 독학으로 PC용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여 원가계산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썼다. 회사에 전산부서가 있었으나 프로그램 개발을 의뢰하면 언제 될지 하세월이었고, 개발자들의 현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아 원하는 프로그램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부서 간 텃세도 있었고, 조직이나 공정이 바뀔 때마다 프로그램 유지보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예 직접 프로그램을 짜서 해결하였다. 그분은 마치 슈퍼맨 같은 분이었다. 그분 따라쟁이였던 나도 자연스럽게 PC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교재를 구입하여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분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의 유지보수 업무를 맡아서 할 정도로 수준이 향상되었다.


세월이 몇 년 더 지나 그분이 먼저 회사를 그만두었다. 여러 면에서 회사가 그분을 품어줄 그릇이 되지 못하였고, 실망한 그분은 더 이상 회사에서 자기가 할 일이 없다며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그분이 떠나고 갑작스럽게 과중한 업무를 떠맡게 된 나는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그러다 새롭게 시작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회사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31년 동안 그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비록 직장이라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기 어려운 환경에서 만난 사이지만, 그분을 통해서 배운 직업관이나 가치관 등은 자연스럽게 나의 의식 속에 내재화되었고,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나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람을 존중하는 '인간존중' '인간애' '동료애' 같은 개념이 은연중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항상 그 부분에 신경을 쓰면서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내가, 새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도 다 그분의 영향을 받은 덕분이었다. 첫 직장에서 첫 상사로 만난 그분은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멘토가 되었다.




회사의 신설 베트남 공장에서 일할 때 또 한 분의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설비 관련 외주 업무를 도와주신 김사장님이라는 분이었는데, 나보다 열 살쯤 연배가 높았다. 그분이 생산설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공장운영 초기 설비설치 및 가동을 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는데, 그때마다 나서서 해결해 주셨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해결이 가능한 전문가를 찾아내어 연결해 주셨다. 게다가 김사장님은 우연하게도 한국에 있는 집도 같은 동네여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김사장님과는 내가 한국 본사로 복귀하고 나서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해마다 하계휴가 때면 아내랑 함께 베트남으로 건너가 김사장님 부부와 베트남 여행을 하였다. 막상 베트남에 근무할 때는 한가롭게 여행할 여유를 갖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베트남 여행을 꽤 많이 다녔다. 호치만 근교를 시작으로 붕따우, 판티엣, 냐짱(나트랑), 달랏 등지를 여행하였다. 김사장님은 거의 여행전문가였다. 여행계획을 A코스, B코스, C코스로 수립하여 나에게 의사타진을 한 후 코스가 결정되면, 교통편 골프장 부킹 호텔 예약 등 하나에서 열까지 정말 세밀하게 준비하셨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매번 VIP 대접을 받으며 힐링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김사장님과의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베트남 서북단에 위치한 사파 여행이다. 31년을 정말 열심히 다녔던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그만두고 나왔을 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망나니 칼춤을 추던 자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을 몽땅 폭로하여 회사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하면 나도 똑같은 놈이 되겠지 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김사장님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왔다.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베트남에 와서 마음 정리나 하고 가.' 그 말씀에 아내와 난 바로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하노이에서 라오까이까지 야간 침대열차를 타고 가서 다음날 새벽 다시 미니버스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사파는 꿈결 같은 마을이었다. 밤안개가 자욱한 호수의 고즈넉한 정취, 알록달록 민속의상을 입은 소수민족 사람들의 순진한 표정,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음식 등.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냥 그곳에 정착하여 살면 화낼 일도 얼굴 붉힐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특히 깊은 감명을 받은 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판시판산에 올랐을 때였다. 산이 너무 높아 바로 오르는 운송수단이 없고 트램 -> 케이블카 -> 트램을 번갈아 갈아타며 올라야 했다.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진귀한 경험을 한 끝에 도착한 3,143m의 판시판산 정상.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저 아래쪽으로 희뿌옇게 깔린 안개바다에 뾰족한 산들이 솟아있고, 그 위로는 산등성이에 구름들이 둥실둥실 걸려 있었다.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시야를 가득 채운 자연의 경외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이 대자연 앞에서 나란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모든 것 내려놓고 그냥 편하게 맘먹고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김사장님 부부와 다시 여행을 떠난 건 코로나19로 막혔던 하늘길이 열리자 마자였다. 2022년 7월 6일. 여전히 코로나19가 진행 중이었지만 사장님을 만나 함께 여행한다는 기대를 품고 베트남 호찌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뀌년(퀴논)이었다. 베트남 중부 다낭과 냐짱 중간쯤에 위치한 곳인데, 월남전 때 파병된 한국군과 월맹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런 상처는 많이 아물고 대형 리조트가 건설되어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가 묵은 FLC 리조트는 기대 이상으로 규모가 컸다. 객실 600여 개의 5성급 호텔, 룸 300여 개의 빌라, 동물원 사파리, 36홀의 골프장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바다를 끼고 있어 자연환경과 풍광이 아주 뛰어났다. 아직 외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베트남 현지인들이 가족단위로 많이 찾아 물놀이도 하고 사파리 투어도 하며 휴가를 즐긴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골프장이 한산하여 우리는 느긋하게 골프 라운딩을 할 수 있었다. 가격도 아주 저렴하여 호찌민-뀌년 왕복 항공권, 스위트룸 3박, 골프 18홀 3일 모두 포함한 가격이 인당 500불 정도였다. 쫓기듯이 라운딩 하며 한 번에 30만 원 가까이 지출하는 한국 골프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라 할만하였다. 그렇게 골프 라운딩과 휴식을 즐기며 모처럼 이국에서의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때가 김사장님 부부와 일곱 번째 여행이었다. 사회에서 만나 그것도 내가 한국 본사에 복귀하면서 인연이 끊어질 수도 있었음에도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김사장님을 마치 큰 형님처럼, 김사장님은 나를 동생처럼 격의 없이 대하며 마음이 잘 통했던 것 같다. 내 아내도 김사장님 사모님과 언니 동생 하면서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 친한 친구 간이나 가족 간이라고 하더라도 매번 부부동반으로 함께 여행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서로 맘이 안 맞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사장님 부부와 우리 내외는 여태껏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는 11월 중순 김사장님 부부와 또 한 번의 베트남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 이번에는 과거 베트남 공장에 근무했던 직장 동료 부부 포함하여 총 네 쌍이 함께 여행하기로 하였다. 김사장님이 역시 A코스, B코스, C코스로 계획을 주셨고, 그중 하나가 선정되었다. 예전에 여행했었던 장소들을 돌아보는 추억여행이 될 예정이다. 주로 오전엔 골프 라운딩, 오후엔 관광과 이동이 될 것인데, 이번엔 또 어떤 사가 펼쳐지게 될지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살면서 사람들에 의해 마음을 다치기도 했지만 또 사람들을 통해 치유받기도 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힘들어 주저앉아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준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살맛 나는 세상을 살고 있다.



※ 그래서 살맛 나는 세상을 마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