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계속되는 노름과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은 오히려 어머니를 중심으로 형제들을 뭉치게 하였다. 어머니는 누가 뭐래도 집안의 기둥이자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만일 어머니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 형제들은 진작에 뿔뿔이 흩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두 살이 채 안되었을 때, 자식 없는 어떤 노부부가 나를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애를 굶길 바에야 차라리 자기네에게 달라고, 잘 먹이고 잘 키우겠다고.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도저히 나를 내어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내 새끼를 남에게 줄 수는 없었다고.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첫째 형 그리고 종전 이듬해에 태어난 둘째 형. 그 어린 젖먹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는 산후조리도 못한 채 식량을 구하러 다녔다. 첫째 손을 잡고 둘째를 업은 채 한 번은 친정집으로 한 번은 시댁으로 구걸을 다녔다. 그랬다. 거의 구걸이었다.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서 친정이건 시댁이건 사정이 나을 게 없었다. 더구나 시어머니는 남편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 아무리 성정이 좋으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친자식들 눈치를 보며 마냥 퍼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어머니는 수시로 친정과 시댁을 찾았다. 때로는 보리나 좁쌀 한 됫박이 전부였을 때도 있었다.
그런 빈곤한 삶 속에서 아들 둘에서 그쳤으면 그나마 나으련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슨 배짱으로 자식들을 계속 낳을 생각을 하였을까? 능력도 대책도 없는 양반들이. 둘째 형을 낳고 사 년 후에 셋째 형을 그리고 또 사 년 후에 나를 낳았다. 그래서 첫째 형과 나는 딱 열 살 차이가 난다. 아주 어렸을 때의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큰형이 나를 안아주기도 하고 자기 발등에 내 발을 올려 걸음마를 배워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자식들이 늘어날수록 삶은 더 빈곤해져 갔고, 달동네 판잣집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형제들 중 가장 피해를 많이 보고 가장 힘든 삶을 살아낸 사람이 큰형이다. 국민학교 1학년 1학기를 다니다 형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분가할 때까지 가족이란 굴레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내가 젖먹이였을 때 큰형은 둘째 형과 함께 외갓집에 한 달, 친가에 한 달 하는 식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부모가 자식 넷을 먹여 살릴 능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큰형은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다. 여전히 어린 나이의 형이 더 어린 동생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눈칫밥을 먹었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하기야 부모와 함께 지내는 나와 셋째 형도 결코 사정이 나은 건 아니었지만.
큰형은 일찌감치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공사현장에서 거친 어른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아이. 처음에는 단순한 잔심부름에 그쳤지만 점점 일의 강도가 심해졌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성인과 똑같이 한몫해야 하는 일꾼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고된 노동 속에 주어지는 잠시의 휴식시간. 빵이나 국수 한 그릇 그리고 막걸리. 어른이 소년에게 술을 따라 주었고 담배를 건넸다. 덕분에 큰형은 일찌감치 술과 담배를 배웠다.
아버지가 도목수로 건축 현장을 책임지면서 형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밤에 공사장에서 잠자며 현장을 지켜야 했다. 형에게 각종 건축자재와 비싼 장비를 지키는 임무가 추가되었다. 공사장 한구석에 합판으로 어설프게 지은 간이 숙소 겸 창고에서, 무더운 여름에는 모기에게 뜯기고, 엄동설한 긴긴밤에는 조악한 전기장판과 조그만 석유난로에 의지하며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춘시절. 남들은 가족과 함께 포근한 방에서 자는데, 형은 외롭게 혼자서 수많은 날들을 버텨야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게다가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 장남으로 태어난 죄. 그게 형의 가장 큰 죄였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옷 갈아입으러 집에 온 큰형을 졸라 함께 공사장에 가서 잠을 잔 적이 있다. 철없는 나는 그저 형 따라 버스 타고 놀러 간다고 좋아하였다. 일 마치고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형과 나만 남았다. 제대로 씻을 공간도 없어서 겨우 세수하고 발 닦고 나서 저녁식사 준비. 라면에 계란 풀고 김치 그리고 식은 밥 한 덩이가 다였지만, 형과 함께 먹는 밥은 너무나 맛이 있었다. 합판 위에 직접 코일을 지그재그로 감아서 만든 전기장판과 온기마저 희미한 석유난로. 벽과 합판 사이 틈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왔다. 형은 내가 추울까 봐 마치 엄마가 새끼를 품듯 꼭 안았다. 그리고 내 발이 시리지 않도록 자기 허벅지 사이에 내 발을 끼워 감쌌다. 덕분에 나는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난로는 이미 꺼지고, 실내에 있던 걸레는 꽁꽁 얼어있었다. 난 형 따라 재미로 보낸 하루였지만, 형은 매일 밤을 그곳에서 혼자 지냈다.
큰형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그렇게 고생하였지만 정작 자신에게 떨어지는 건 없었다. 아니 건축주에게 받은 공사비를 아버지가 노름으로 다 날리는 바람에, 오히려 형이 인부들에게 시달리기까지 하였다. 뼈 빠지게 일해도 주머니에 남는 건 없고,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형이 워낙 성정이 착하고 무던하여 버텨냈지, 그렇지 않았으면 집을 뛰쳐나가도 열번 백번은 나갔으리라 싶다. 그런 형이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결혼하고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나가면서였다. 당시 외국에 근로자로 나가려면 기능사 자격증이 있어야 했는데, 그게 형의 발목을 잡았다. 이미 기술이야 톱클래스이지만,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형에게는 필기시험이 어려웠다. 보다 못한 셋째 형이 큰형을 도왔고, 4전5기 끝에 필기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실기는 한 번에 가뿐하게 통과하였다.
큰형은 이라크에서 일했다. 뜨거운 태양과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공사현장에서 밤늦도록 이어지는 잔업을 마다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할 때는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 게 없었지만, 그곳에서는 달랐다.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왔다.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편안하였다. 형은 그렇게 번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서 썼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였다. 형이 이라크에 일하러 간 지 삼 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렇다고 형이 장남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큰형은 귀국 후 목수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일을 워낙 꼼꼼하게 잘해 함께 일하자는 사람이 줄을 섰다. 한동안은 장비가 잔뜩 실린 트럭을 타고 전국을 누비면서 제재소 설비 놓는 일을 하기도 했다. 형은 땅을 사서 집도 직접 지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집을 입맛에 맞게 지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운 그 지긋지긋했던 목수일이 형의 평생 직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직업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집도 장만하였다. 형은 형수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았는데, 세월이 훌쩍 지난 후 식구들과 지인들 몇몇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때 내가 사회를 봤다.
이제 나이가 칠십 대 중반에 이른 형은 집 근처에 있는 공원묘원에서 제초작업 등 일을 하며 지낸다. 평생 노동으로 힘들게 살아온 형이 이제 좀 편하게 쉬어도 좋으련만, 몸에 밴 습관이 가만 놔두지를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같이 작업하는 인부들과 마시는 막걸리 한잔. 형은 담배는 진작에 끊었지만, 술은 여전히 많이 마신다. 나이를 생각해서 술을 줄이라는 형수의 성화에 그나마 상한선을 넘지 않는 정도이다. '일하려면 술을 먹어야 혀. 술이 보약이여.' 형이 늘 주장하는 말이다. 고달팠던 인생길, 한잔 술이 없었다면 형이 버틸 수 있었을까? 그런 면에서 보면 형에게는 술이 진짜 보약인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큰형에게 전화를 하였다. '이, 그래 막내야!' 핸드폰을 통해서 들려오는 형님 목소리에 술기운이 배어 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래, 잘 지내고 있지. 넌 어떠냐?' 겨우 명절 때나 한 번씩 안부전화 하는 무심한 동생이지만, 형은 언제나 반갑게 받는다. 그리고 술기운 탓일까, 전화 말미에 생뚱맞은 고백을 했다. '막내야, 사랑한다!' 칠십 중반의 할배가 육십 중반의 동생에게 사랑한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고? 생각지도 못했던 형님의 말에 울컥하고 눈앞이 흐려졌다. '형님, 술 조금만 줄이고 건강 잘 챙기세요.' 하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하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