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 2025 #2
베트남과 한국과의 시차는 두 시간. 아침 7시에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여지없이 6시에 잠에서 깨어나 간단하게 씻고 전투복장 차림으로 빌라를 나섰다. 맑은 하늘에 바람이 솔솔 부는 게 우리나라의 막 가을로 접어드는 정도? 아침부터 더울 거라는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 몇 컷 담고 나서 리셉션 데스크 2층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우리가 일착이었다. 직원이 자리를 안내하고 메뉴를 가져다주었다. 원래는 뷔페식인데, 그날 손님이 적어 뷔페 대신 주문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메뉴에 있는 거 다 주문해도 된단다. 전채요리부터 샐러드 메인요리 음료 디저트에 과일까지 스무 가지가 넘었다. 과유불급. 배가 부르면 플레이를 망칠까 봐 적당히 주문하였는데, 그 양도 꽤 많았다. 너무 맛있어서 사진 찍는 것도 잊고 입안으로 부지런히 옮겼다.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두어 컷 남김.) 음식 중에서도 역시 베트남에서 먹는 쌀국수는 진리였다. 일행들 모두 넉넉하게 주문하여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이제 배도 채웠고 슬슬 오늘 미션을 수행해야지?' 그래도 골프여행인데 할 일은 해야 했다. 여행 호스트 큰 형님의 재촉으로 마지막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준비되어 있는 카트를 타고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이동. 골프장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호치민 시내와 달리, 이렇게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골프장에 오면 황제골프를 칠 수 있다는 게 베트남 골프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특히 주중에는 더 그러하였다. 사모님 조 먼저 출발하시고, 사장님 조가 그 뒤를 따랐다. 1번 홀. 페어웨이를 배경으로 사장님 조 단체사진 찰칵. 클럽하우스를 배경으로 또 한 장 찰칵. 2025년 베트남 골프여행의 첫 라운딩을 기념사진으로 남겼다.
사나이들이 라운딩 하는데 내기가 빠지면 섭섭한 일. 두 사람씩 편 먹고 캐디피 내기를 하였다. 공교롭게도 김사장님과 신부장님이 한편, 문사장님과 내가 한편이 되었다. 졸지에 대한민국파와 베트남파 간의 국가대항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분들은 평소 홈그라운드에서 실전으로 칼을 날카롭게 간 선수들이고, 문사장님과 나는 베트남에서 골프 친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한 이방인들이었다. 그게 분명한 스코어 차이로 나타났다. 그날부터 우리 팀이 삼일 연속 캐디피를 냈다. 그리고 4일 차 네 번째 라운딩에서도 지고 나서는 '배 째라, 돈 없다.'고 생떼를 부렸다. 4전 4패. 분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나중에 한국에서 복수전을 하자며 분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내기에는 졌지만 라운딩은 재미있었다. 잘 가꾸어진 페어웨이와 그린. 그다지 덥지 않은 날씨.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 젊고 싱싱한 캐디들. 막간에 그늘집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 뭐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서도 몇 번째 홀인가, 갑자기 나타난 바닷가 풍광에 정신을 홀딱 빼앗겨 버렸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파랗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 점점이 떠 있는 하얀 구름. 티샷도 잊은 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한참 후 정신을 가다듬고 심기일전하여 날린 티샷. 하늘을 곧게 날아가 페어웨이 중앙에 떨어지는 나이스 샷이었다. 그 샷 하나로 그날 꼬였던 라운딩의 모든 갈증이 싹 풀렸다.
라운딩이 끝나고 클럽하우스에서 점심 식사하고 리조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묵었던 빌라에서 서두르지도 여유롭지도 않은 템포로 씻고 짐 챙기고. 하루만 묵고 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버스에 올랐다. 이제는 삼 년 전 진짜 좋았던 뀌년(영어발음 퀴논)의 FLC 골프리조트로 떠날 시간. 거기는 또 얼마나 좋게 변했을까 기대하는데, 김사장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하루 전에 연락이 왔는데, 리조트에서 숙박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일주일 전 불어닥친 태풍으로 끊긴 전기가 여전히 복구되지 않아 리조트 운영불가. 대신에 뀌년 시내에 있는 FLC 호텔로 숙소가 바뀌었다고 했다. 호텔에서 골프장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였다. '어허, 리조트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광이 좋아서 뀌년 뀌년 했는데...' 적잖이 아쉬웠다. 그나마 골프 라운딩은 가능하다고 하니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실은 여행에 들뜬 나머지, 점심식사 하면서 소맥을 몇 잔 마시는 바람에 온정신이 아니기도 했지만, 김사장님의 말씀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태풍이 와서 문제가 좀 생겼구나 정도로만 이해하고 흘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태풍 피해는 무척 심했고, 피해지역도 광범위하였다.
아나라 골프리조트에서 뀌년까지의 거리는 250킬로로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예상 소요시간이 네 시간이나 되었다. 더구나 고속도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국도로 가야 했기에 버스가 맘껏 달릴 수가 없었다. 오전 라운딩과 마신 술에 노곤함이 밀려와 꾸벅꾸벅 졸았다. 수도 없이 졸다 깨기를 반복하였지만 여전히 버스 안. 그러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 캄캄한 어둠 속을 얼마나 더 갔을까, 마침내 저 멀리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어 졸음을 쫓고 주변을 살펴보니 뭔가 이상했다. 어수선하다고 할까, 지저분하다고 할까.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로변 인도와 주위의 풀이나 나무 등의 모습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태풍 피해인가 싶었다. 도심으로 접어들수록 상황이 더 심각하였다. 길가 가로수들이 한 방향으로 20~30°쯤 기울어 있었다. 개중에는 몸통 중간이 똑 부러진 것도 있었고, 뿌리째 뽑힌 것도 있었다. 태풍에 굳세게 버티던 건 허리가 부러지고, 뿌리가 부실한 건 뿌리째 뽑히고, 적당히 타협한 건 비스듬히 기울고. 인생사에도 풍파를 만나면 인간들도 그렇게 나뉘는데 싶었다.
어렵게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하고 저녁식사를 호텔식당에서 했다. 시간도 늦었을뿐더러 거리가 어수선하여 식당을 찾아 나서기가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FLC 골프리조트 측에서 숙소 변경에 따른 베네핏으로 320만 동(원화 16만 원 정도)의 쿠폰을 주었다. 거기에는 우리 차량으로 골프장으로 이동하는 조건이 따랐지만, 어차피 우리 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쿠폰은 호텔 식당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태풍의 여파로 일부 식재료가 공급되지 않아 주문이 안 되는 메뉴도 있었지만, 배를 채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해물볶음밥에 우리의 김치에 해당하는 모닝글로리 볶음 그리고 쇠고기 스테이크 등 요리 몇 가지를 추가하였다. 술은 가지고 간 양주를 꺼내니, 보틀 차지 40만 동(원화 2만 원)에 언더락스 잔과 얼음 가득 채운 얼음통을 가져다주었다. 모두 잔을 채우고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의미의 건배를 하고,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배정된 객실로 올라갔다. 전날 묵었던 널찍한 빌라에 비하면 호텔 스탠더드 객실이 아주 소박했지만, 부부 둘이 자기에는 오히려 포근한 안정감이 드는 게 좋았다. 그럼에도 차례로 씻고 나서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이 꿈나라로 고고씽. 다음날 아침 딱 여섯 시, 기계처럼 눈이 떠졌다. 커튼을 걷고 발코니로 나가보니 해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가 구름에 걸려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고, 시원한 바닷바람에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나서 보이는 건 태풍 피해의 잔재. 나무가 쓰러져 있고, 창고인지 나직한 건물의 지붕이 뜯겨 있고, 먼산 위에 조성된 '웰컴 뀌년' 입간판은 뭉그러져 있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태풍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배부르게 식사하고 나서 전투복장으로 버스에 올랐다. 호텔에서 2박 할 예정이었으므로 라운딩 후 돌아와서 샤워하면 되었다. 30여분 가는 동안 차장밖으로 보이는 것은 멋진 바다 풍경과 더불어, 태풍 피해 현장과 피해 복구에 나선 주민들 모습이었다. 가로수들이 쓰러진 것은 물론이고, 수백 미터에 걸쳐 전봇대들이 쓰러져 있기도 하였다. 전봇대 몇 개는 부러져 있었다. 처음 한두 개가 쓰러지고 나서 전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차례로 쓰러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외에도 공장지붕이 떨어져 나가고, 벽이 무너져 내리고. 곳곳에 피해가 막심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 복구에 전념하고 있었다. 부러진 나무 가지를 잘라내어 트럭에 싣고, 기울어진 나무는 바로 세우고, 엉망으로 어질러진 주변을 청소하고.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 피해 복구에 땀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들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한가롭게 골프나 치고 있어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도 우리 같은 여행객들이 찾아와서 머물다 가는 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였다. 피해지역이라고 여행객들이 일정 취소하고 발길을 끊는다면, 그곳 상인들이나 골프장과 리조트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사기가 더 꺾이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나저나 우리는 골프장에 골프 치러 가는 사람. '태풍 피해가 막심한 상황에서 골프장이 엉망이 되었을 수도 있고, 골프는 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