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 2025 #3
걱정 반 기대 반으로 FLC 골프장에 도착하였다. 다행히도 외견으로 보이는 골프장 모습은 괜찮았다. 안내 직원들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니 더 안심이 되었다. 한국의 골프장에 가면 미소대신 든든하고 신뢰 가는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데, 베트남에는 환한 미소로 손님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 같다. 클럽하우스 데스크에 접수하고 번호표와 식사 쿠폰을 받았다. 점심이 공짜란다. 화장실에 들러 물 빼며 몸도 마음도 단단히 출격 준비하고, 카트에 올라 10번 홀로 이동. 후반부터 도는 코스였다. 코스에 직접 도착하고 보니 역시 태풍 피해가 눈에 띄었다. 중간이 부러지고 뿌리째 뽑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고 잎이 말라있는 나무들이 많았다. 베트남의 중부지역까지는 태풍이 거의 없는 나라였는데, 언제부턴가 태풍이 늘었다. 그리고 우기 때 한두 시간 내리는 스콜도 마치 우리나라의 장맛비처럼 하루 종일 내리기도 한다. 세계적인 기상이변이 베트남이라고 피해가지는 않는 것 같다.
티샷 박스에 서니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바람. 태풍이 지나간 지 일주일이 훌쩍 넘었는데, 무슨 바람이 그렇게나 세게 부는지. 물론 골프장이 바다를 끼고 있는 링크스 코스에 바람을 막아줄 변변한 언덕이 없기도 하였지만, 불어도 너무 불었다. 아마도 방풍림 역할로 심어놓은 나무들이 피해를 입는 바람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라운딩 내내 바람과의 싸움이었다. 특히 나같이 체격이 부실한 사람에게는 더 불리하였다. 체중이 묵직하게 나가 하체가 단단하게 받쳐주어야 하는데, 제대로 서있기는커녕 살짝 허공에 뜬 기분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오버 웨이트인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불필요한 살은 달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샷 감각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어찌어찌 공을 맞췄다.
페어웨이로 잘 날아간 공이 바람에 휭 날려 벙커로 들어갔다. 거기서 친 공이 또 바람을 타고 그린 사이드 벙커로 가고. 바람과 벙커와의 싸움. 라운딩 내내 그랬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페어웨이를 지나 러프로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공을 찾을 수 없거나 찾더라도 샷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이 전혀 정리되지 않아 공 찾는데 시간 다 보내고, 번번이 경기 흐름을 끊어 놓았다. 결국은 쓰러진 나무 사이로 들어간 공은 무벌타 드롭으로 꺼내 놓고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삼 년 전 이곳에서의 골프는 이렇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에 조금은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 치는 골프는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나만 불리한 조건도 아니었고, 또 태풍이 지나간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게라도 골프를 칠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기도 하였다. 마음을 조금만 내려놓고 그 상황을 즐기면 되는 것. 더구나 라운딩 후 공짜로 주는 점심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른다. '어려운 조건에서 공친다고 고생했으니 맘껏 드세요.' 하는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안주 삼아 소맥 한잔 원샷. 쌓였던 미스샷에 대한 분노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호텔로 돌아와서 샤워하고 갖는 휴식시간. 아내는 다른 사모님들과 쇼핑 나들이 가시고, 혼자 침대에 누워 그날의 라운딩을 반성하고 다음 날의 멋진 샷을 그려보았다. 한참을 빈둥거리다 커피 생각에 1층 로비로 내려가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마침 들어오시는 사모님들과 딱 마주쳤다. '혼자 어디 가시려고?' 마치 몰래 나쁜 짓하려다 걸린 것처럼 뻘쭘해지는 상황. '아니, 사모님들이 소식이 없어 걱정이 돼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슬쩍 얼버무리고 함께 바에 앉아 음료 한잔씩. 나는 코코넛라테. 베트남에서 마시는 커피는 확실히 아이스가 맛있다.
김사장님 사모님 말씀이 주변을 둘러본 결과 저녁식사를 할만한 식당이 없다고 하셨다. 원래는 딱 하나 있다는 한국식당에 가려고 했는데, 영업을 안 하는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피해 복구 중이라 거리도 어수선하고 영업 중인 변변한 식당도 보이지 않고. 그러면서 그냥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해야겠다는 말씀. 사모님들 호출에 사장님들 모두 로비로 모였다. 사장님들 중 배짱 좋게 사모님 말씀을 거스를 분은 없었고, 함께 호텔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식사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으나 막상 달리 할만한 것도 없어 줄줄이 줄 맞춰 사모님 뒤를 따랐다. 식당에 들어가서는 전날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전날 먹었던 음식에다가 몇 개 추가하여 주문하였다.
음식이 들어오고 오늘은 무슨 술을 반주로 하나 궁금하던 차에, 김사장님께서 아껴둔 비장의 무기를 꺼내셨다. 중국 3대 명주 중 하나라고 하는 우량예주. 한자로 '오량액(五粮液)'이라고 하는데, 고량, 쌀, 찹쌀, 밀, 옥수수의 다섯 가지 곡식을 증류하여 빚어낸 술이다. 김사장님이 들고 오신 술은 그중에서도 68° 짜리. 도수가 높아도 한참 높았다. '68도? 저걸 마시면 식도가 타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식당 직원이 가져다준 작은 고량주잔에 밑에 살짝 깔릴 정도로 술을 따랐다. 코끝에 가져가 보았다. 알듯 모를 듯 옅은 향에 찐한 알코올 도수가 느껴졌다. 잔을 기울여 입안에 조금 흘려 넣었다. 입안에 확 퍼지는 알코올 기운. 혀로 한 바퀴 굴린 후 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내리는 짜릿함. 그리고 가슴 전체로 퍼지는 찐한 느낌. 확실히 도수가 낮은 술 하고는 달랐다. '이게 우량예 68°구나!' 싶었다. 첫 잔에 식도와 위장이 조금은 마비가 되었는지 두 번째 잔은 그나마 덜했다. 평소 맥주나 소맥 정도나 마시던 나는 그날 모처럼 귀한 경험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나서 다시 찾은 FLC 골프장. '어제 하루 경험 했으니 오늘은 잘 쳐야지.' 다짐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바람이 전날보다 더 심하게 불었다. 티샷 하기가 힘들었고, 그린에서 퍼팅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바람 감안해서 오조준하여 샷을 날리면, 하필 바람이 잦아들어 공이 똑바로 가서 벙커로 들어갔다. '이런 덴장! 내가 공치러 왔지, 삽질하러 왔나?' 그래도 덕분에 삽질 실력은 늘었다. 푸른 잔디가 멋지게 깔린 페어웨이를 마다하고 벙커와 러프에서 삽질만 하다 라운딩이 끝났다. 더불어 스코어도 엉망. 그래도 고된 노동 후라 그런지 밥 맛은 좋았다. 베트남 골프장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대부분 한국사람 입맛에 맞다. 아무래도 골프장을 찾는 한국사람들이 많다 보니, 김치를 밑반찬으로 제공하는 곳도 많다. 그곳도 그랬다. 김치와 상추에 쌈장까지. 더구나 야채튀김에 새우구이 닭튀김 등 음식이 얼마나 맛있던지, 골프에서의 아쉬움을 음식에서 다 풀었다. 거기에 덧붙여 시원한 맥주 한잔. 베트남에서 마시는 맥주는 또 얼마나 맛있는가! 매번 느끼지만 한국에선 이런 맛이 안 나는데 정말 신기했다. 그리고 태풍으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임에도 손님 접대에 최선을 다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잘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크루즈선을 본떠 지은 리조트에 묵지 못한 아쉬움을 사진으로 남기고 다음 여정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역시 밤이 되어 도착한 다음 목적지는 냐짱(영어발음 나트랑) 근처의 다이아몬드 베이 리조트였다. 체크인하고 배정받은 숙소에 짐 넣어두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해물볶음밥에 모닝글로리 볶음 그리고 쌀국수. 사모님들은 피자에 짜조(페이퍼롤)까지 다양하게 시켰다. 신부장님이 고급진 와인을 꺼냈다. 베트남공장에 주재원으로 와 있는 후배가 준 것이라고 하였다. 전임 법인장님들과 드시라고. 모두 고마워하며 잔 채우고 건배로 인증샷을 남겼다. 신부장님 이야기로는 베트남 공장이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특히 새 부지에 건설한 2공장은 공장도 공장이지만, 사무실에 스마트 오피스를 구현하여 어느 일류기업 부럽지 않게 꾸몄다고 하였다. 내가 베트남 공장을 일굴 때에는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자금사정이 나빴고, 베트남에서 생산할 제품이 수익성도 좋지 않아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땀 흘렸었다. 사장님으로부터 내핍생활 그만하고 직원들 잘 먹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근무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당시 내가 쏟았던 땀과 노력이 지금의 베트남 공장 발전에 조금은 기여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쪼록 후배 직원들이 좋은 환경에서 더 열심히 일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았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