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베트남 여행 2025 #4

by 이은호


다음날 아침 6시. 여지없이 눈이 떠졌다. 밖에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애고, 이렇게 비 오면 골프 못 치는데 싶었다. 다이아몬드 베이는 우리 일정 중 가장 비싼 골프장. 잘 가꿔진 코스에서 멋진 라운딩을 하고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우산 쓰고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빌라 사잇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끝에 백사장과 바다가 있었다. 탁 트인 바다는 아니고 반원형으로 둘러싸인 만. 그래서 다이아몬드 베이인가? 이름 한번 잘 지었네 싶었다. 이름에 걸맞게 비 내리는 바다가 운치가 있었다.



한 바퀴 산책하고 나니 배가 출출.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일착. 그곳에는 휴양온 손님들이 많아 뷔페식으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도 잔뜩. 주로 동양인보다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은데, 베트남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날씨가 따뜻해서 특히 겨울철에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들은 골프보다는 가족 단위로 리조트에 머물면서 찐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둘러 골프 치러 가야 하는 사람들. 접시 들고 바쁘게 한 바퀴 돌아 푸짐하게 음식을 담아왔다. 또 빠지면 안 될 쌀국수 받으러 갔다가 옆에 굽고 있는 계란프라이까지 받아서 왔다. 와 이러면 아침부터 과식인데? 싶었지만 깔끔하게 다 비웠다. 베트남에만 오면 늘어나는 식사량. 내가 봐도 놀랍다. 베트남 음식이 확실히 나에게 맞는 것 같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마치 소나기 쏟아지듯이 내렸다. '이래서는 골프 못 치는데.' 생각에, 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김사장님 따라 리셉션 데스크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직원에게 골프 부킹 취소여부를 문의하니, '나는 모른다. 리조트와 골프장은 별개다.'라고 하면서 상황을 알아봐 줄 수도 없다고 하였다. '나는 리조트 담당일 뿐 골프는 내 소관이 아니니 모른다.' 딱 잘라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골프장까지는 택시로 10분 걸린다며 직접 가서 확인하라고 하였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 전날밤 체크인할 때 안내직원은 골프장까지 버기로 실어준다며 골프백 키핑까지 했는데, 그래서 버스도 오후 2시나 되어서 오라고 했는데. 큰 일이었다. 전날밤 체크인 상황을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모른다. 내 소관이 아니다.'로 일관했다.


거기서 더 실랑이해 봐야 뾰족한 해결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제는 다들 짐 싸들고 골프장으로 가는 수밖에. 김사장님이 버스 기사에게 연락하니 다행히도 근처에 있었는지, 30분 내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느긋하게 비 오는 풍경 감상하다 갑자기 바빠졌다. 모두들 빗속을 뚫고 바쁘게 움직여 짐 싸들고 다시 모였다. 곧이어 버스가 도착하고, 괜히 내렸던 골프백 다시 싣고 버스에 올랐다. 비는 주룩주룩 더 거세게 내렸다. 사정은 골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취소가 안된다고 하였다. 골프를 치든지 말든지 환불은 안된다는 것. 돈 다 받았으니 배짱인가, 황당했다. 허어, 이 비를 맞으며 골프를 치라고? 일행이 모여 의논하였다. 칠 것이냐, 말 것이냐. 난 정말 치기 싫었지만 한번 쳐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미 지불한 비용도 아깝고, 또 사실 잘 가꾸어진 골프장이었기 때문에 그냥 떠나기가 아쉽다고 하였다.


모두들 단단히 정신무장 하고 출격하였으나, 첫 홀 첫 티샷에 홀딱 젖었다. 그나마 티샷은 나았다. 카트 타고 달리자 날아드는 빗줄기에 몸은 물론이고 시트도 젖고 장갑도 젖고 골프채 그립도 젖고. 우산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컨샷부터는 물이 없는 곳으로 공을 옮겨 놓고 쳐야 했는데, 변변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샷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철퍼덕. 흙과 잔디가 사방으로 튀고 한 움큼이 안경을 때렸다. 그린은 더 가관이었다. 물이 고여 공이 굴러가지 않는 것. 퍼팅 한 공이 수상스키를 타고 가다 멈췄다. 네 홀인가 지나고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완전 폭우 수준. 할 수 없이 홀과 홀 사이에 있는 그늘집으로 대피하였다. 그나마 영업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맥주를 마시든 커피를 마시든 하련만, 텅 비어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그러고는 한참을 억지 추억에 잠겨있어야 했다.


'세차게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날이 생각이 나네'



하염없이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생각나는 추억 속에 님도 없고,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진 틈을 타 다시 라운딩을 시작하였다. 그러고는 일곱 번째 홀에서 완전 기권. 비가 더 세차게 폭우가 되어 쏟아지는 바람에 도저히 플레이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함께 비 쫄딱 맞으며 수중쇼를 펼쳤던 캐디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클럽하우스로 복귀. 뚝뚝 떨어지는 바짓가랑이 물을 꼭 짜고 들어가 샤워실로 향했다. 따끈한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쓰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낭패였다. 당연히 라운딩이 취소될 것으로 예상하고 갈아입을 속옷을 챙기지 않았던 것. 어떤 분은 입었던 팬티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나는 눈 질끈 감고 노팬티 노런닝으로 겉옷을 입었다. 지퍼만 조심하면 될 일. 속옷 없이 겉옷만 입으니 살갗에 닿는 기분이 시원 야릇하였다. 아하, 이것도 나쁘지 않은 걸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식사 메뉴 중 한국식 육개장이 있었다. 비 쫄딱 맞고 먹는 얼큰하고 뜨끈한 육개장. 그보다 멋진 궁합이 있을까? 먼저 소맥 한잔하고 나서 뜨끈한 국물에 밥 말아서 한술. 속이 확 풀렸다. 이번 베트남 골프여행의 일관된 특징. '골프에서 맺힌 한을 음식으로 달래다.'였다. 비 오는 날에는 맥주보다는 소주가 딱이지 싶어 연거푸 소주잔을 비웠다. 식사 마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나올 때까지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버스에 짐 싣고 몸과 마음도 싣고, 아쉬웠던 다이아몬드 베이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버스가 출발하였다. 다음 목적지까지는 두 시간 남짓 그것도 대부분 고속도로를 달리는 길이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비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날 시작된 폭우가 며칠 동안 계속되어 그 지역에 물난리가 났다. 심지어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SNS에 '나트랑 물난리. 현재 상황' 같은 동영상이 넘쳐났다. 시내가 온통 물에 잠기고, 가옥이 침수되고,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래도 남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태풍에 폭우에. 이번 베트남 여행은 참으로 버라이어티 하였다.


해가 살짝 넘어가 어둑해질 무렵 판티엣의 노바월드 리조트에 도착하였다. 골프장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으나, 흠뻑 젖은 골프백을 말리기 위하여 짐을 몽땅 가지고 내렸다. 배정받은 객실로 가 클럽을 꺼내어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한 건 흠뻑 젖은 골프화를 말리는 일이었다. 흙을 털어내고 마른 수건으로 닦고 휴지를 신발 안에 채워 넣었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말리기. 대충 정리하고 나서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속옷은 챙겨 입었다.


그곳도 러시아 휴양객들이 많았다. 식당에도 바에도 정원에도 러시아 사람들이 가득했다. 뽀얀 얼굴에 다들 덩치가 컸다. 그들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휴양온 사람들이라 그럴까, 그저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들 지도자는 전쟁광으로 사람죽이기 바쁜데, 그들의 모습은 평화와 평온 그 자체. 반면에 우리가 시끄러웠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좀 채우고 나자 그동안 버스 타고 오면서 조느라 다물었던 입을 열고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았다. 수중 라운딩을 펼쳤던 무용담에, 그런 상황에서 부킹 취소도 안 해주는 골프장에 대한 원망. 그럼에도 잘 먹고 잘 놀았다는 자화자찬까지.


그날 저녁식사 때는 비 오는 낮에 마신 술이 과해서 깔끔하게 맥주 한잔으로 끝냈다. 식사자리를 일찍 끝낸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불빛에 찰랑이는 수영장, 아담한 연못엔 연꽃이 피어 있고, 팔을 활짝 벌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예쁜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얀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귀 기울여 보았다. 바람과 파도가 들려주는 노래에.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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