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나이에서의 뜨밤

베트남 여행 2025 #5

by 이은호


노바(NOVA) 골프장은 페어웨이가 널찍했고 전체적으로 시원하게 쭉쭉 뻗은 코스가 매력적이었다. 맘껏 휘둘러도 웬만해선 공이 죽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 그래서일까 첫 홀부터 모두 티샷을 시원하게 잘 보냈다. 게다가 김사장님은 버디까지. 시작이 좋았다. 그리고 더 좋았던 건 페어웨이에 카트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공이 떨어진 곳까지 타고 가서 다음 샷을 하면 되니 얼마나 편리한지 몰랐다. 시작 전 조금씩 내리던 비도 그치고, 구름에 해가 가려 덥지도 않고 그야말로 최상의 조건이었다.


베트남은 1인 1캐디로 라운딩을 한다. 그리고 카트 운전을 손님이 한다. 한국 캐디는 혼자 카트 운전에, 네 사람 각각 거리에 맞는 클럽 전달에, 그린에서는 퍼팅 라인까지 봐주고, 스코어도 기록하는 멀티플레이어지만, 베트남은 다르다. 자기가 맡은 한 사람만 챙기면 된다. 클럽 전달하고 햇볕 가리는 양산을 들고 있는 게 주 임무다. 초보자들도 많아서 그것마저도 어려운지 엉뚱한 클럽을 내미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 요즘은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베트남에도 남자 캐디가 많이 늘었다. 그런데 남자 캐디들이 나긋나긋함은 없지만, 보통은 퍼팅 라인도 더 잘 보고 센스가 있어 골퍼의 스코어 관리에 유리한 편이다.


그날 내 캐디는 여자 캐디였는데, 베트남 여성치고는 키도 크고 몸매가 늘씬한 젊은 아가씨였다. 게다가 몸에 쫙 달라붙는 스판 바지를 입어 하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굴곡도 예사롭지 않았다. 보기에 좀 민망했지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캐디가 코스 매니지먼트가 뛰어났다. 티샷 방향부터 세컨샷 남은 거리와 방향 그리고 그린에서의 퍼팅 라인까지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내가 실력이 부족하여 매번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하였지만, 그녀가 알려준 대로만 쳤으면 엄청난 스코어를 기록했을지도 몰랐다. 후반 파4 홀에서 그녀가 알려준 퍼팅 라인 대로 쳐서 버디를 하였을 때는, 마치 자신이 버디 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고마운 마음에 십만 동(원화 5천 원) 팁을 건넸다. 어쩐지 아침에 김사장님께서 잔돈이 필요하지 않느냐며 주시더라니, 다 쓸데가 있었다. 비록 그날 스코어는 평범했지만, 그녀 덕분에 골프 치는 내내 재미있었다. 그렇게 그녀 엉덩이를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라운딩이 끝나 있었다.



라운딩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역시 공짜로 주는 식사를 하였다. 시원한 맥주 한잔과 함께. 이번 골프여행은 아침은 숙소에서 주고, 점심은 골프장에서 주고. 저녁만 우리 돈으로 사 먹으면 되었다. 돈이 그만큼 절약될 수밖에. 게다가 베트남은 골프장이라고 특별히 음료나 음식값이 비싸지 않다. 한국 골프장의 경우는 정말 비싼데, 베트남은 일반 식당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이건 술이건 값에 신경 쓰지 않고 양껏 먹을 수 있다. 그게 또 과식 과음으로 이어지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곳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충분하게 먹었다. 배불리 먹고 나서 깨끗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역시 일하는 것보다는 놀고먹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렇게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번 골프여행도 끝자락을 향하여 치닫는 시간. 버스에 올라 마지막 목적지인 동나이 골프리조트로 향했다.


동나이 골프장은 내가 베트남 공장에 근무할 때 자주 갔었던 곳이다. 이후에도 베트남에 여행 갈 때마다 한 번씩 들렸던 곳. 코스에 해저드도 있고 강도 있고 키 높은 나무숲에 굴곡도 있어, 아기자기하고 재밌는 골프장이다. 그러나 쉬운듯하면서도 스코어가 잘 나오지 않는 곳으로, 홀에 따라서는 과감한 도전을 또 어떤 경우에는 철저히 절제하며 라운딩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여러 번 갔음에도 갈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드는 곳이다.


해가 막 떨어질 무렵 동나이 골프장 리조트에 도착하였다. 배정받은 숙소에 짐 풀면서 창밖으로 보니 골프장 풍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거쳐왔던 다른 곳과는 달리 리조트가 골프장 안에 있는 곳이다. 내일 아침에는 저기서 라운딩을 할 텐데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다. 이번 골프여행에서의 마지막 라운딩. 지금까지는 부진한 스코어에 기가 꺾였지만, 최소한 마지막인 내일은 뭔가 보여주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김사장님의 식사 집합 호출이 떨어졌다. 일행 모두 가벼운 차림으로 리조트에서 나와 클럽하우스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동나이 골프장은 한국 골퍼들이 참 많다. 심지어 방학 때에는 한국의 프로 지망생들이 전지훈련을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연습장에서 연습하는 그들 뒤에서 샷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전혀 힘들이지 않는 부드러운 스윙을 하는데, 공은 빨랫줄처럼 쫙쫙 뻗어나가는 것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스윙하는 걸 한참 지켜보고서, 정작 나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뒤땅을 쳤다. 아무튼 골프장을 찾는 한국사람들이 많다 보니 한식요리가 많았고 또 맛도 훌륭하였다. 서울의 유명호텔에서 일했던 셰프가 주방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저녁식사는 완전 한국식으로 주문하였다. 돌솥비빔밥에 돼지 두루치기와 버섯 야채볶음 그리고 술은 문사장님이 가지고 온 양주. 베트남 골프여행의 마지막 밤인 만큼 아쉬움 반, 끈끈함 반으로 한잔 두잔 잔을 비우다 보니 술이 금세 동났다. 다시 한국 소주를 주문하여 또다시 한잔 두잔. 이번 골프여행의 또 다른 특징은 식사 때마다 반주로 곁들이는 술이었다. 맥주 소주 와인 양주에 우량예까지. 주량은 신부장님과 문사장님이 셌고, 김사장님과 내가 약했다. 하지만 각자 주량에 맞추어 마시면 되는 일. 누가 억지로 권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분위기에 취하고 정에 취해서 한잔 한잔 잘도 넘겼다.


너무 맛있는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고 정신도 알딸딸해져 식당을 나왔다. 이미 캄캄해진 밤이었지만, 숲과 나무사이로 솔솔 부는 바람에 은은한 향기까지 실려왔다. 상쾌함을 넘어 므훗한 기분. 청춘 때라면 숲길 사이로 손잡고 걸으며 알콩달콩 뭔 꽃이라도 피워보련만, 이미 몸도 마음도 따라주지 않는 나이. 모두의 발걸음은 숙소로 직진하였다. 그럼에도 그냥 넘기기에는 섭섭했을까? 누가 이끄는 사람도 없는데, 다들 김사장님 숙소 거실로 모였다.


'이제 뭐 하지' 하는 표정으로 애꿎은 맥주만 축내고 있는데, 그런 분위기를 절대 용납 못하는 신부장님이 나섰다. '묻지 마세요 물어보지 마세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둠칫둠칫 몸짓까지 곁들이며 노랠부르던 신부장님이 갑자기 노래를 뚝. '에잇, 가사를 모르겠네.' 하면서 인터넷으로 노래가사를 찾았다. 그랬다. 이미 우리는 노래방에 길들여진 세대. 화면에 자막이 흐르지 않으면 노래 한곡도 마무리 못하는 인생들이 아닌가. 이윽고 신부장님 입에서 다시 노래가 흘러나왔다. '...흘러간 내 청춘 잘한 것도 없는데 요놈의 숫자가 따라오네요' 하필이면 왜 그런 노래를 선택했을까. 안 그래도 한살 한살 나이 드는 게 서운한데.


신부장님에 이어 문사장님이 핸드폰을 들었다. 변진섭의 '새들처럼'. 소싯적 사모님과 즐겨 불렀던 노래라며, 부부가 합창으로 부부애를 과시했다. 반면에 김사장님이 핸드폰 들고 부르는 노래는 바로 '불나비 사랑'.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정말 얼마나 사무치는 사연이 있으셨길래 사모님 앞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실까 싶었지만, 노래는 노래일 뿐 오해하지 말자. 다들 손뼉 치고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부르고, 나는 카메라 감독이 되어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아아, 노래방이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것을, 그곳은 외진 곳이었다. 한 살만 더 젊었어도 택시 불러 밖으로 나갔을 텐데, 그러기엔 몸이 못 따라주는 나이. 아쉬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들 장단 맞추고 호응해 줘,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런대로 재밌고 뜨겁게 보냈다.



(초상권 보호로 진짜 동영상을 못보여 드립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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