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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산 Apr 28. 2020

늙은 남자

"이쪽으로 밀어야지"
휠체어에 몸을 맡긴 늙은 남자의 목소리는 톤은 낮았지만 짜증이 묻어 있다. 노인의 거무튀튀한 얼굴엔 살이 없어 가죽과 뼈가 붙은 듯이 보인다. 유행하는 감염병으로 얼굴의 반은 마스크로 가렸지만 튀어나온 광대뼈로 인해 더욱 퀭해 보이는 눈동자는 조급함과 불안감으로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게요.”
늙은 여자는 남편의 질책보다 휠체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당황하는 표정이 가득하다. 여자는 작은 체구의 몸을 기울여 휠체어를 엘리베이터 문 쪽으로 다시 힘주어 밀어 본다. 휠체어 앞바퀴는 장애인을 위한 바닥 돌기에 미끄러져 왼쪽으로 쏠린다.  
 
"에이 이쪽으로…"
노인은 병원 이름이 무늬처럼 새겨진 헐렁한 환자복 속에서 겨울철 나뭇가지 같은 손을 꺼내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킨다.  
 
“이게 잘…”
작고 초라한 외모보다 당황한 모습이 여자를 더 안쓰러워 보이게 한다. 색 바랜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뒤섞여 여기저기 부스스하게 삐쳐 나온 모습이 밤샘 간병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여든은 되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작고 주름이 가득하다. 읍내 장터 후미진 골목의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조몰락대며 다듬은 봄나물을 광주리에 조막 조막 쌓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순한 눈빛이다. 남자는 늙은 여자의 쩔쩔매는 모습에서 여자의 지난 세월 고단한 삶을 머릿속에 상상한다.
 
"제가 밀어 드릴게요"
뒤에서 아내의 링거 밀대를 잡고 있던 남자는 휠체어를 잡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는다. 네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하게 움직인다.
늙은 부부와 조금 덜 늙은 부부는 외래진료실로 향하는 길이다. 의사는 전날 이비인후과 수술을 받은 아내와 늙은 남자의 상처를 살피고자 병원 정규 진료 시간 전에 수술 환자들을 부른 것이다.
외래 병동은 입원 병동과 3층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당연하다는 듯 노인의 휠체어를 밀고 있다. 그 뒤로 늙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고 아내는 여자보다 서너 걸음 뒤에서 밀대를 밀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다.
복도 골목을 돌아 안내 데스크를 지나자 한쪽이 큰 창으로 이루어진 긴 복도가 이어진다. 텅 빈 공간을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과 드문 드문 켜져 있는 노란 실내 불빛이 채우고 있다. 햇살에 비친 노인의 머리카락은 이제 아무런 멋도 필요 없고 편리한 관리만 중요하다는 듯 머릿속이 훤히 보이도록 볼 품 없이 짧게 깎여 있다. 머리에서 시작된 검버섯은 얼굴까지 내려와 노인의 훈장처럼 흉하게 번져 있다.
 
고맙다는 말도 없고 괜찮다는 말도 없다. 낯선 이의 도움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노인은 마음속 무언가를 감내하는 듯 시선을 앞으로 꼿꼿이 고정한 채 표정이 없다. 환자복 속에 감춰진 구부정한 어깨와 기름기 빠진 육체에선 젊음을 호령했던 패기도, 힘든 난관 앞에서도 잃지 않는 자신감도, 웃음과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도 찾아볼 수 없다.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 노인의 모습과 자신의 미래가 교차되어 보인다. 생각을 떨치려 눈을 들어 봄이 오긴 이른 창 밖 정원으로 시선을 보낸다. 잎은 남아 있지 않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의 모습이 마음을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먼저 진료실로 들어간 늙은 부부가 나오고 남자와 아내는 진료실로 들어간다. 내시경으로 수술부위를 살핀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으니 사후 관리에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10여분 후 진료실을 나오니 텅 비어 있어야 할 대기 의자에 늙은 부부가 아직 앉아 있다. 돌아가는 길을 찾기 어려워 병동 간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멀리서 중년의 간호사가 잰걸음으로 노부부에게 다가선다. 간호사는 휠체어를 밀고 병동 쪽 복도로 발걸음을 옮긴다. 남자와 아내도 밀대를 밀며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늙은 여자가 남자에게 발걸음을 돌려 다가온다.
 
“고마웠어요”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다. 늙은 여자는 부드러운 눈빛을 남긴 채 종종걸음으로 늙은 남자를 쫓아간다. 남자는 여자의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감사 표시에 당혹하여 대답을 찾지 못한다. 어느새 늙은 여자는 간호사가 밀고 있는 남편의 휠체어 옆에서 속도를 맞추어 걷고 있다. 노인은 다가온 늙은 여자를 향해 거죽 같은 손을 부르르 떨며 내민다.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엷은 미소와 함께 어릴 적 손 잡고 소풍 가는 동무같이 늙은 남자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준다.
 
따라가던 남자는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에서 따스한 봄기운을 느낀다. 밀대를 잡고 있는 아내의 작은 손 위에 남자의 손을 살며시 포개며 아내와 눈을 맞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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