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그릇 스토리 하나~
우리 엄마는 흔히들 말하는 옛날 분인데도 음식이나 그릇에 아주 관심이 많고 솜씨도 남다르십니다. 그런데도 우린 그것이 당연한 건 줄 알고 자랐지만 지나고 보니 말하자면 엄마는 원조 그릇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찬장엔 예쁜 그릇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고 옷이나 먹을거리 선물보다 이쁜 찻잔 선물을 더 좋아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늘 그릇에 관심이 많으셔서 남들이 말하는 좋은 그릇도 좀 있었지만, 어릴 적 엄마랑 시장엘 가면 시장통 그릇가게나 길거리 그릇도 그냥 지나치치 못하시고 쭈그리고 앉아 특이하면서도 유용한 걸 몇 개씩 고르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아주 오래전, 엄마랑 아버지가 가까운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시는 날, 우린 모두 다 부모님 집에 모였습니다. 그때 엄마가 작은 방에 상자 여섯 개가 있으니 가져오라고 하시더군요. 바로 육남매 아들딸들 몫의 그릇 여섯 세트였습니다.
일본 여행을 가며 자식들 선물을 사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무겁게 일본에서 들고 오기도 어렵고 일본에 돈 많이 쓰기도 싫으시더랍니다. 물론 그릇을 살 생각을 하신 거고요. 그래서 당시에는 동네마다 더러 수입품 가게가 있었는데 엄마가 가끔 구경도 하며 잘 알고 지내던 가게가 있었지요. 아는 동네가게 기분 좋게 매상도 올려주고, 여행 떠나기 전에 편리하게 여섯 세트로 여행국의 그릇을 한국에서 미리 사놓고 떠나신 겁니다.
엄마는 나중에 틈틈이 전화로 그 푸른 색감의 공기에 하얀 쌀밥을 담아보라고, 보통보다 큰 면기만 한 국그릇은 곰탕이나 육개장처럼 조금 양을 많이 담는 걸로도 좋다고 전해주시기도 했어요. 그릇 생산국은 다르지만 우리 음식을 잘 어울리게 담아 먹을 수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또, 노랗게 조밥을 지어 도토리 묵밥을 담아 먹으면 보기 좋다고 하여 가끔 도토리 묵밥을 만들 때는 이 넓은 그릇을 꺼내어 쓰기도 했습니다. 도토리묵밥에 조밥의 궁합을 그래서 일찍이 알기도 했네요. 당시 제가 결혼 초반의 딸이어서 살림 코치를 하실 겸 이런 조언들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울 엄마는 그릇과 음식의 조화도 생각하시던 분인 것 같습니다.
이 뿐 아니라,
결혼해서 살기 바빠 여유로이 그릇을 바꿔가며 살지 못하는 걸 보며 가끔씩 이쁜 그릇을 선물하십니다. 어느 해의 결혼기념일에는 꽤 괜찮은 브랜드의 상차림 세트 일체를 어느 그릇에나 코디가 잘 되는 깨끗한 흰색 계통으로 선물하셔서 질리지 않고 두고두고 평생을 사용할 수 있는 행복이 제게 있답니다.
엄마는 늘 몸이 허약하셔서 병원을 자주 다니셨어요.
그 무렵 엄마를 찾아갔더니 꼬마 시루를 꺼내어 놓았더군요. 제가 쪼끄맣고 참 귀여운 게 이쁘다고 몇 번 말했던 걸 기억하시며 웬일인지... 이 시루를 얼른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봄에 쑥버무리 같은 건 사 먹는 것보다 쌀가루 조금 빻아다 놓고 집에서 손쉽게 만들어 먹는 게 더 맛있다고 말하셨지요. 쌀 두 되 정도면 가득 차는 아주 작고 앙증맞은 사이즈입니다.
엄마는 평소에 미리 방앗간에서 쌀가루를 미리 빻아다 두었다가 우리가 가면 즉석 간식으로 김이 펄펄 오르는 떡을 쪄서 넓은 접시에 푹 쏟아 주기도 하던 시루였지요. 외할머니의 무시루떡, 호박고지 콩설기 등이 우리 아이들의 쏘울 푸드처럼 남아있답니다. 철없는 딸은 눈치 없이 좋아라 하면서 냉큼 가져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영영 아주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갑자기 ‘얼른 가져가라’는 말이 뒤늦게 두고두고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렇게 봄이 찾아오면 엄마가 계신 그 산의 청정한 쑥을 뜯어옵니다. 해마다 봄 산에 쑥쑥 자랐을 쑥을 보따리 가득 담아와 엄마의 그 작은 시루에 봄향 가득한 쑥설기나 쑥버무리를 찝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것이, 누군가의 기억에서 흐릿해진다는 것이 꼭 서글프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남아있는 밥그릇이 있고 꼬마 시루가 있고 또 간절한 그리움이 엄마와 더욱 밀착하게 하는 힘이 있네요. 그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