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낸 밀라노는 마치 도시가 휴점을 공지한 듯 고요하다.
성탄 이튿날인데도 아직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어둠 속에서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가 저 혼자서 반짝인다.
베네치아에서 막 돌아온 밀라노의 어둡고 한적한 밤거리를 부부는 걸었다. 수백 년 역사를 느끼게 하는 오래된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함께 채워진 패션거리엔 독특한 디자인의 간판들만 어둠 속에서 불 밝히고 있다. 간판을 들여다보며 이 거리만 걸어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웬만한 패션 브랜드를 모두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숙소 근처의 레스토랑이 문을 연 것을 확인했다.
문 연 가게가 많지 않아서 이곳으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인다. 간신히 빈자리 하나 찾아서 앉을 수 있었다. 리소토도 스파게티도 커피도 모두 기대 이상이다. 운이 좋다. 한 잔 마신 맥주까지 입 안에 감칠맛을 돌게 한다. 허기와 갈증을 마음껏 채우며 그 맛을 즐기던 저녁이었다. 더구나 홀 안을 흐르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귀를 시원하게 뻥 뚫어준다. 베네치아의 한낮을 보내고 돌아온 밀라노의 밤은 기분 좋은 노곤함이다.
숙소로 돌아와 확인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즐겁다.
< 4월의 비 내리는 베니스엔 바람까지 심하게 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성가신 나는 스카프를 세모로 접어 묶고 선글라스를 쓰고 같이 갔던 S에게 물었다. 어때? 나 소피아 로렌 같지 않니? 암튼 그 무엇에 쫒기지 않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여행길 보기 좋다. >
여행지에서 찻잔 사는 습관이 있다 보니 이번에도 작고 이쁜 에스프레소 잔과 접시 두 장 구입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었다.
< 언젠가 우리 다혜가 잘츠부르크인가 모차르트 생가에 가서 찻잔을 사다 주었지. 또 베네치아에서 구입한 유리공예 컵을 막 쓰고 있지. 너를 통해 어떤 이의 여행기를 읽는 것처럼 기쁘구나. 산타루치아도 듣고 있으신가 >
무제한 데이터 로밍인데도 버벅거리는 통에 주고받는 글 보내기 하고 나서 조마조마했는데 꾸물꾸물 거리다가 아슬아슬하게 등록 성공이다. 휴~ 밤 열두 시가 다 되었는데도 자꾸만 느려 터지고 번번이 되돌아오는 전송 실패에 답답해 하다가 잠들었다.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나 늦잠꾸러기인데도 계속 새벽 4시에 눈이 떠진다. 내게 한국시간이 잊히기엔 아마 1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하물며 이삼일이 지난 지금 시차는 여전히 한국식이다. 그래도 들뜬 여행자의 기분으로 생체리듬은 정상이다. 이제 밀라노의 크리스마스는 끝났고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