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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유럽여행의 프롤로그...

그해 시월에 난,

by 리즈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 본다.
그해 시월의 가을,
여행기록이 내 마음을 멈추게 한다.
옮겨본다.


시월의 따스함이 좋다.
이 따스함 속에서 살고 있는 시간이 좋다.
시간을 누리느라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 또 딱히 바쁜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유럽의 찬 바람과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생각나 그저 서울의 이 따스함에 겨워하는 중일뿐이었다.

가을엔 뉴욕엘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일정상 길어질 것 같아 다시 프라하와 뮌헨 쪽으로 일주일 정도의 날들을 계획했다.


이제는 전과 다르게 비행시간을 견디기가 참 쉽지가 않다. 벌써부터 11시간의 비행시간이 아득하다. 두 가지의 신문과 기내잡지를 천천히 읽어주고, 헤리슨 포드의 신나는 한 판 인디아나 존스를 보고도 잠이 오지 않는다. 지나가는 승무원이 건네는 파인 주스 한 잔 마시고 다시 이어지는 카메론 디아즈의 유쾌 발랄한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났는데도 아직 겨우 우랄산맥 위를 날고 있다. 모두 불을 끄고 비행기 창의 덧문도 닫은 어둠 속에서 불빛 한 줄기 밑에서 퀼트 하는 여자가 있었다. 지루한 비행의 퇴치방법도 이렇게 연구해 둘 필요가 있고나. 비행기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밤새 날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견디며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또 지하철을 타고 muzeum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바로 바츨라프 광장이다. 찬 밤바람과 함께 프라하 시민들과 여행객들의 활기가 느껴지는 도심 한복판이다. 예정된 숙소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먼저 마구 사진도 찍고 광장의 아래쪽으로 걸어보기도 하며 프라하에 온 걸 확인하고 마음속 가득 이 도시의 바람을 집어넣었다.

미리 숙지해온 민박집 찾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빌딩 같은 큰 건물의 대문의 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리고 내 또래쯤 되는 아줌마가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우릴 반긴다. 그 건물의 꼭대기층에 있는 이쁜 뾰족 지붕 숙소에서 나흘을 지냈다.

프라하성과 까를교, 성 비트 성당, 세계문화유산인 체스키, 신비로운 야경과 블타바 강, 동화처럼 소설처럼 지나갔던 보헤미아의 풍경들, 체코 맥주와 소시지, 쯔비벨무스터와 크리스털... 여기에 민박의 특별함까지 체코는 동유럽의 매력을 새삼 더해준 날들이었다.
*
아침 비행기로 뮌헨으로 떠나던 날,
어스름 새벽에 나온 바츨라프 광장의 상쾌함은 프라하에서의 마지막을 피부 깊숙이 느끼게 했다. 뮌헨행 루프트한자에 오르니 한 시간도 채 못되어 금방 뮌헨 공항에 데려다준다. 예약되었던 호텔로 후다닥 달려가 짐을 맡기고 우리는 짤즈부륵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짤즈행 기차에 오르기 전 시간이 조금 남아서 뮌헨 중앙역 위로 나가 잠깐 둘러보며 역 건물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에 감탄했고, 내가 그리도 와보고 싶었던 뮌헨의 공기를 맡으며 이리저리 걸어보기도 했다.^^
*


두 시간 정도를 달리는 짤즈행 기차 속에서 보이는 창 밖의 풍경은 가을걷이를 모두 마친 늦가을이다. 잘츠부르크. 두 시간의 기차로 우리는 오스트리아에 있다. 내 머릿속으로, 눈 앞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영상이 마구 지나간다. 미라벨 정원과 언덕 위의 호헨 잘츠부르크 성, 수도원, 모차르트, 게트라이데 거리의 예술적인 디자인의 간판들, 거리의 음악가들과 화가들, 빗방울...
*


그리고 뮌헨의 중앙역으로 다시 돌아온 건 늦은 밤이었다.
프라하에서 뮌헨, 그리고 잘츠부르크, 다시 뮌헨으로, 3개국을 오간 바빴던 하루였다. 강행군이었는지 꿈도 없이 푹 잠들었다가 깨니 새벽이었다. 뮌헨의 아침이다.

뮌헨은 옥토버페스트가 막바지로 거리엔 온통 축제 물결이었다.
내가 이 맥주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처럼 드문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오전에 교외의 다카우 수용소엘 다녀오면서 곧바로 뛰어든 그곳에서 전통복장을 입은 남녀들이 쏟아져 나온 축제의 인파 속에서 맥주도 마시고, 빵에 소시지를 올리고 겨자소스를 바른 긴 빵을 손에 들고 먹으며 축제의 일원이 되었던 시간들, 밝은 미소의 사람들이 넘쳐나는 비 내린 후의 젖은 도로 위에서 입 맞추는 연인들이 아름다웠고. 그리고 늦가을 기온의 시린 바람이 넘실대던 슈바빙...




뮌헨 공항에서 서울 가는 비행기에 올라 신문을 펼치니 여배우의 죽음이 큰 제목으로 전면을 채우고 있었다.
최진실...
기내 TV의 뉴스에서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내며 흘리는 슬픈 눈물의 화면이 계속되고 나 역시 충격이었고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래...
그래도,
그럼에도,
세상은 잘 살아낼 일만 남았다.
따스하기만 한 시월의 가을 햇살이 이렇게 나를 맞이하고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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