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안 붙이면 안 되나요? 천천히 찬찬히 다니며 살면 좋겠다.
지난봄과 여름 사이에 내가 갔던 베를린도 요즘과 비슷한 날씨였다. 그즈음의 적당한 바람과 햇살 뿌리며 푸르던 하늘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하던 기온도 마치 우리의 초가을인 요즘과 흡사해서 간간히 떠올려진다.
잠깐 머물다 온 베를린이었다.
첫날 나가서 쏘다니고 난 후 불쑥 조바심이 났다. 잠깐 다녀 갈 곳은 절대 아닌데... 하긴 간신히 시간 내어 떠나온 여행자들에게 어딘들 그렇지 않을까만. 베를린 거리를 걸으면서 이곳에선 더 오래 뭉개고 싶은데 하는 생각만 자꾸만 들었다.
얼마 전 아는 이들과 이야기 나누던 중 타지에서 한 달 살기의 열풍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러다가 살고 싶은 곳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후와 비용, 언어 등의 이유로부터 여러 나라들이 분분하다. 베를린이라고 말했던 내게 왜?라고 묻는다. 딱히 선뜻 말이 안 나와 얼버무렸다. "글쎄, 뭐... 어쩐지 거기선 하루하루가 괜찮을 것 같아요." 이어지는 실질적인 이유를 듣고자 하는 눈으로 나를 계속 바라본다. "... 꼭 이유를 안 붙이면 안 되는 거예요.?"ㅎ~
주로 교통이 좋은 곳에 숙소를 예약한다.
위치상 그 도시에서 괜찮은 지역임에도 길거리엔 의외로 노숙자도 보인다. 그런 베를린인데도 수수한 듯 잘 살아가고 있다는 모습으로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던 중 남편이 이 근처에 사진 박물관이 있으니 들렀다 가겠냐고 묻는다. 물론이지~.
헬무트 뉴튼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진 박물관이다.
전시장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간다. 카메라와 가방을 맡기고 입장해야 한다. 휴대폰 하나만 들고 가볍게 들어서면 사진 속의 시선들이 관람객을 에워싼다.
사진작가 헬무트 뉴튼은 도발적이고 섬세한 표현을 하는 작가다.
또한 퇴폐적이고 관음증적인 작품이 많다는 사전 지식을 가지고 들어섰는데 예상보다는 덤덤하다. 하긴 20세기 중반에 이런 사진을 찍었으니 그때만 해도 획기적이거나 파격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19금스럽다고 할 수 있으나 작품 앞에 서고 보니 외설도 아니고 관음 따윈 아니란 생각이 든다. 렌즈가 몸에 집중했지만 사진예술로 승화되어 표현하는 것도 사진가의 능력이다.
몇 달 전 모델 한혜진의 누드사진이 기사화된 걸 본 적이 있다.
이곳에 그 사진과 거의 흡사한 사진들이 몇몇 전시되어 있다. 심지어 최근의 작품인 한혜진 누드 사진은 완전 블랙으로 사람 본연의 색채를 가렸다. 그런데 몇십 년 전 헬무트 뉴튼의 누드는 자연 그대로의 사람을 담았다. 사진 속에 사진가와 모델의 당당함이 있다.
2층의 흑백사진은 사람을 스며들게 하는 마력을 뿜어낸다.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흑백의 색감만이 전하는 차분함과 밸런스를 조절하는 힘을 받는듯한 느낌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배우와 가수들, 패션이나 광고물과 특색 있는 사진들을 제시한다. 전시장마다 그의 사진가적 업적이나 걸출한 표현을 마음껏 느껴보라는 듯 풍성하다.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예술적 거점은 LA, 파리, 몬테 카를로 등이다. 세계적 소비사회 어디에서든 국경을 초월한 활약을 했던 오늘날 최고의 거장이었다. 2004년 83세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남겨진 엄청난 양의 사진을 그의 고향인 베를린 시에서 전시하며 예술가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사진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꾼 헬무트 뉴튼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다.
베를린에서는 보고 나면 가슴 뿌듯할 전시장을 아주 저렴하게 멀미가 날 만큼 가볼 수 있다. 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한 번 입장하는데 대략 10유로 정도다. 3일 사용권 29유로짜리 베를린 뮤지엄 패스 한 장을 사면 베를린 시내 수십 개의 전시장을 모두 갈 수가 있다. 패밀리 티켓이나 학생 티켓은 또 할인받는다. 물론 무료관람도 많다. 베를린에는 다양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유난히 많다. (50여 개의 갤러리가 있다고 알고 있다) 소중한 것들을 잘 모아 보관하고 전시하는 것이 그들의 특성인 듯싶기도 하다.
그곳 쿠담 거리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폭격을 맞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있다. 이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반성하며 독일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총탄 자국 그대로 보존 중이라고 한다. 그 옆 계단엔 층마다 희생자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들을 기리는 꽃과 사진과 촛불이 군데군데 놓여 있는 걸 보니 독일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물론 그 옆에 따로 현대적인 육각형의 건물로 새 교회를 지었다.
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잘 보존하여 타산지석 삼는다.
화해와 용서를 나누는 걸 그들은 두고두고 실행한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전쟁을 기억하도록 의도한 흔적들이 아주 많다. 지난번에도 독일 대통령이 폴란드에서 열린 2차 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서 독일군에게 희생된 폴란드인들을 기리며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일본 아베 정권이 과거사를 부정하며 한국과의 관계는 이미 정리됐다는 인식을 보이는 얼굴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그런 독일인들 덕분에 잘 보존되어 가는 역사적 유물들을 실컷 볼 수 있다.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가 함께 나아간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베를린 영화제 등 문화예술이 일상이다. 산책 코스에 대성당이 있고 공원 숲이 있고 검소한 빈티지 벼룩시장도 있다. 물가도 높지 않은 편이다. 물론 독일 맥주는 기본이다. 주변국의 도시도 기웃거리면서 날마다 낯선 경험 속에서 단순하게 사는 시간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하면서 이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찬찬히 살피며 살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사진박물관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2차 세계대전 전쟁 이야기로 빠졌다. 그리고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의 도시 이야기까지 오지랖을 넓혔으니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릴 이야기인가 하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가 눈꼽만치 아는 베를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