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는 흩어진 일상을 균형 있게 정돈할 수 있게 한다. 이럴 때 도심을 떠나 우리 선인들의 인품과 덕망이 깃든 아름다운 전통문화유산을 찾아 나서는 일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조선시대의 후학 양성을 했던 유교 교육기관인 ‘서원'은 건축물의 역사적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옛 선인들의 멋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내장산 단풍으로 유명한 전북 정읍엘 가보자. 양반의 걸음걸이처럼 여유로운 풍경으로 맞이하는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이 있다.
지난 7월 조선 시대 성리학 전파의 산실이었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상북도 영주시 소수서원 △경상남도 함양군 남계서원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서원 △전라남도 장성군 필암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병산서원 △전라북도 정읍시 무성서원 △충청남도 논산시 돈암서원 등 총 9곳으로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가을볕이 가득하다.
대부분의 서원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산세 좋고 고적한 곳에 위치해 있다. 정읍의 무성서원은 민가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제법 위세가 느껴지는 규모가 큰 서원들의 모습과는 달리 무성서원은 조촐하다. 하지만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학문의 기회를 제공하던 서원이었다. 평등의 가치가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올곧은 교육을 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소통의 공간이 되도록 한 것이 무성서원의 특징이다. 그래서 민가의 누구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입지적 이점이 돋보인다.
무성서원은 신라 말기의 유학자 고운 최치원을 제향 하기 위한 서원이었다. 1615년 태산서원으로 출발했다가 숙종 22년인 1696년 임금님의 친필로 쓴 사액(賜額)을 받아 무성서원으로 개칭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라북도 유일의 서원이다. 가히 1천여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곳이다.
출입문에 들면 무성서원 출입문 현가루(絃歌樓)가 문루(門樓) 형식으로 얹혀있다.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노후해져서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빛바랜 단청과 기둥의 나뭇결 사이로 오랜 세월 지탱해온 세월의 더께가 촘촘하다. 학습공간인 명륜당과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어지는 마당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계절의 정취를 한껏 더한다. 특히나 이곳이 가사문학의 시조인 정극인의 상춘곡의 배경으로 봄이면 운치가 빼어난 마을이었다고 한다.
중앙부에 있는 공부하는 강당(講堂)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앞 뒤가 넓게 탁 트여있어서 뒤편 내삼문과 7위를 모신 사당인 태산사의 태극문양이 배경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民)을 향해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인 배려심을 보인 것이라 한다.
마당 옆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유생들의 기숙 공간인 강수재가 독립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앞에는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최익현 선생 등의 의병활동 기록을 적은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가 있다. 이것은 무성서원이 전북지역의 선비정신의 정신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 향교나 서원은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국립인 반면 특히 서원은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지방 유학 세력을 구심점으로 하는 서원은 양반들의 이익집단이나 계파 형성 등으로 문제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성서원은 모든 백성들에게 열린 소통을 강조한다. 건축물도 권위를 돋보이도록 설계를 했거나 특별히 멋 부린 것 없이 간결하다.
현재 무성서원은 세계유산 등재 이후 다양한 서원의 활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인문학 강의와 풍류체험과 한문경전 등의 교육프로그램이 있으니 문의 후 참여해보면 좋을 듯하다. 또한 서원 안내를 받고자 하면 입구의 사무실에 문화재 해설사를 신청해서 친절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이렇게 역사적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다가가고 참여하는 일은 의미가 크다. 이제 지금껏 품위 있게 그 자리를 지켜온 무성서원의 천년의 세월을 만나러 떠나볼 때다.
* 타지에서 무성서원 오가는 방법
무성서원은 '면(面)' 지역에 있어 만약 자가용이 없을 경우 오가기에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성서원은 칠보면의 면소재지와 근접한 곳에 있다. (칠보면은 산내면·산외면 지역을 오가는 거의 모든 버스가 서는 데다.) 게다가 서원은 여름이면 거대한 물미끄럼틀을 포함한 물놀이장 시설을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공원인 '칠보물테마유원지'와 가깝다. 그렇기에 정읍 시내에서 무성서원을 오가는 버스는 통상 시골이란 선입견과 달리 적잖다.
정읍역 건너 명물육개장 앞 버스정류장 또는 정읍터미널 밖 종로종합약국 앞 버스정류장에서 151번, 151-2번, 151-5번, 135번, 155번 버스를 타고 40여분을 가면 '원촌'이라는 이름의 정류장이 나온다. (전 정류장과 그 전 정류장의 이름은 '묵동'과 '원두'이다.)
이 정류장서 내려 600m 정도 걸어가면 무성서원이 나온다. 정류장서 서원 간은 평지길로 걷기 어렵지 않다. 위의 농어촌버스는 시간표(정읍시청 온라인·모바일 홈페이지 참고)대로 운행된다. 하루 27회 운행되며 다른 지역에서 정읍역이나 정읍터미널 도착할만한 점심 전 오전 시각대에는 30-40여분에 한대꼴로 운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