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오락가락하고 폭우와 폭염으로 일상이 주춤하다. 그 사이 주로 8~9월에 피워내던 해바라기가 이제는 철도 없이 피고 지고 있었다. 길도 나지 않은 언덕을 오르기 전에 백련이 가득한 연못을 지나고 군데군데 남아있는 수련이 생존을 알린다. 밭둑 위로 노랗게 해바라기 군락이 보인다. 풀섶 둑길을 걸으며 뜨거운 김이 훅훅 느껴지는 여름날이다.
조붓한 그 길을 따라 저 언덕 위로 넓은 밭의 해바라기가 장마와 폭염으로 무참하게 축축 늘어져 있다. 마치 뙤약볕 아래서 처절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벌판에 모두 함께 뒤섞여 피어 태생적으로 고독과 외로움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는데 수 만평의 풍광은 지독한 고독으로 다가온다.
태양의 꽃(sunflower)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해바라기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자비한 무더위 속에 늘어진 채 맥을 못 추고 있는 모습, 안쓰러움이 발동한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태양을 바라보던 모습은 간데없다. 이렇게 지구가 변해가고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 우리가 산다.
세파에 지쳐 고개 숙인 해바라기 모습만큼이나 그리스 신화 속의 해바라기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물의 요정 크리티에(Clytie)는 태양의 신 아폴론을 사랑하였으나 그는 바빌론 왕의 딸인 레우코토에를 흠모하고 있었다. 질투에 사로잡힌 크리티에의 모함으로 레우코토에를 죽게 했고 상심한 아폴론은 크리티에를 더욱 철저하게 외면했다.
사랑에 상심한 크리티에는 하루 종일 아폴론의 상징인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앉아서 해만 바라보았다. 9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해만 바라보던 그녀의 다리는 땅속으로 들어가 뿌리가 되고 얼굴은 꽃이 되었다. 이 꽃이 '태양의 꽃(sunflower)' 해바라기다.
해바라기는 자생력이 강해서 어디에서나 쉽게 뿌리내리고 번식하며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다. 높이 2m 정도의 키다리 식물이며 까슬까슬한 털이 억세지만 꽃의 지름은 8∼60cm로 제법 크고 밝은 얼굴의 꽃이다.
해바라기는 이런 신화가 아니어도 떠올려지는 이야기가 많다. 열정적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고, 잘 알려진 드라마나 노래도 있다. 그중에 우선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의 영화‘해바라기’를 가장 많이 떠올릴 듯싶다. 도대체 영화 시작부터 끝도 없이 펼쳐지는 해바라기의 물결은 무슨 이유인지 생각해 볼만했다. 게다가 그 러브테마 음악은 어찌나 가슴 저리게 했는지. 뿐만 아니라 어쩐지 해바라기와 소피아 로렌의 인생도 함께 겹쳐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스타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듯 소피아 로렌도 파스타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내 몸은 스파게티로 만들어졌다"라고 할 정도였다. 가난했던 그녀가 영화배우가 되려는 이유도 " 그냥 다섯 가지 파스타를 매일 먹을 수 있는 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어서..."라고 했다. 미모만큼 사랑스럽다.
그랬던 그녀는 16살에 만났던 이십여 년 나이 차이의 영화 제작자 카를로 폰티와 결혼해서 스타의 반열에서도 스캔들이나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다. 폐 합병증으로 남편 폰티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재혼할 생각을 묻는 질문에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며 오직 남편만 바라보는 사랑을 드러냈듯이 영화 해바라기에서처럼 85세인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해바라기’는 당연히 그녀의 인생작이고 여전히 소피아 로렌만의 작품이라고 할만하다.
그뿐인가. 아주 오래 전의 경쾌한 노래가 있다. 가수 Glen Campbell의 Sunflower 란 노래는 풋풋했던 그 옛날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들려와도 즐거웠고 무심코 혼자서 흥얼거려도 기분이 좋은 리듬이었다. 누군가는 케케묵은 리듬이라 웃겠지만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해바라기 밭을 오가며 느닷없이 기억 속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기분 좋은 순간이다.
Sunflower, Good morning, You sure do make it like a sunny time "좋은 아침, 당신은 언제나 기분이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는군요." 하며 시작하는 긍정적인 노랫말처럼~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숭배', '기다림' 등의 꽃말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그 느낌이 전해지는 꽃. 영화나 그림이나 노래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하늘을 향한 그리움과 희망으로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의 마음이 저절로 느껴진다. 비록 폭염과 폭우와 세상을 뒤덮은 바이러스가 기진맥진하게 할지라도 해바라기의 노란 희망처럼 이 험한 시절을 모두들 잘 건너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