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과일과 채소를 파는 동네 상가 앞에서 멈추었다. 뭐 좀 살게 있을까... 애호박이랑 바나나를 집어 들었는데 열무 상자 앞에서 잠깐 망설이긴 했다. 엊그제 저녁 식탁에서 누군가 열무김치 얘기를 했었기에...
아이를 갖고 입덧 중에 친정에 갔을 때였다. 입덧 극복을 위해 엄마의 밥을 먹으면서 입맛을 찾으려 했지만 엄마의 정성과 수고로움이 무색하게도 세상 진수성찬 앞에서도 도무지 잘 먹어주질 못해서 죄송했다.
온몸의 의욕이 빠져나간 모습으로 힘없이 식탁 앞에 앉아있는데 엄마가 식사를 하시려는 듯 널찍한 그릇에 열무김치를 넣어 밥을 비비고 있었다. 순간 온몸의 세포가 동요하며 구미가 확 당겼다. 내 눈이 반짝이는 걸 본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그릇째 내게 넘기셨다. 엄마는 밥 생각도 없으면서 딸의 입맛 돋우려고 짐짓 열무비빔밥을 내 앞에서 만들었고 작전 성공이었던 것이었다. 입덧 후 처음으로 한 그릇 가득 먹어치웠고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엄마의 열무김치는 지금껏 먹어본 것들 중에서 비길데 없이 특별하다. 칼칼한 매콤함과 신선함, 그리고 개운함... 엄마 살아생전 친정에서 수없이 날라다 먹은 덕에 이미 긴 세월 익숙해진 그 맛,
엄마 찬스는 끝났고... 도무지 이젠 그 맛을 재현할 수 없으니 지금도 열무김치 담그는 일은 엄두를 못 낸다. 이만큼 밥 해 먹고살았으니 이젠 웬만큼 할 수는 있겠지만 열무김치만큼은 늘 슬그머니 자신감을 내려놓는다. 엄마의 손맛과 사랑이 스민 알 수 없는 그 비법. 그때의 열무비빔밥을 잊지 못한다. 맛의 기억은 영원하다.
.
.
채소가게 주인이 말했다. '요즘 가을 열무는 맛없다'고. 담그지 않아도 될 핑계가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 가장 평가가 좋은 셰프의 쇼핑몰에서 열무김치를 주문했다. 스티로폼 상자에 누군지 모를 기계적인? 손맛이 배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