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기고 수염을 제거하고 찜통에 삶아내는 일이 이 더위에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주방 바닥에 펼쳐놓고 옥수수 수염을 정리하면서 느닷없이 수십 년 전의 추억이 소환되었다.
중학교 2학년쯤이었다.
수학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수학선생님은 좋아했다. 말이 없고 늘 조용하신 분이었는데 수업시간의 음성도 늘 차근차근 나지막했다. 그때만 해도 훈육이라는 명분 아래 선생님들의 체벌이 때론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그분은 체벌은커녕 언제나 학생들을 존중하는 화법으로 늘 신사적이었다. 아이들은 그분 수업엔 저절로 바르게 수업에 임하게 되고 우리 대부분은 수학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런데 수학이라는 과목과는 달리(?) 매우 부드러운 분이었는데 반전은 당시 흔치 않게도 태권도 유단자였다. 방과 후엔 태권도 도복을 입고 절도 있게 태권도 반을 가르치는 모습이 멋있어서 강당 창문을 통해 빼꼼히 들여다 보기도 했던 게 생각난다.
여름이었다. 그분이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이 들려왔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문득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수업 중에 수업 외의 말을 별로 하지 않는 분이었는데 그냥 가볍게 말하고자 애쓰시는 것 같았다.
"요즘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지난주엔 수업을 못해서 미안하다. 중략... 내가 태권도 4단이고 발차기를 하면 내 키보다 높이 올라가는데 요즘은 그게 쉽지 않다."
대충 이런 말을 하면서 아마 신장 쪽이 안 좋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러면서 병원 치료도 하면서 좋다는 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옥수수 수염이 좋다고 꼭 해보라는 말을 들었으나 집에서 아무리 사다 모아도 안되더라. 옥수수 수염을 어디서 그렇게 많이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음 날부터 어디서 그렇게 모았는지 우리 교실 앞 교탁 위에는 아침마다 옥수수 수염이 쌓였고 반장은 교무실로 옮겨다 드리는 일이 한동안 이어졌다. 비록 아무리 민간요법일지라도 그게 좋다면 우리도 무조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날은 친구 부모님이 한 보따리 싸들고 교실 밖 복도에 놓고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눈물겹도록 따뜻한 모습인데 당시에는 당연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마음들이었다. 요즘이라면 가능한 일일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존경하던 황**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하신지 궁금해졌다. 어디서든 멋진 할아버지로 살아가고 계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