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새해. 붉은 말의 힘찬 기운을 받으며 평온한 제주 여행
새해다. 어제와 이어지는 오늘이다. 어수선했던 세밑의 날들을 넘기고 맞은 새해는 별다를 게 없이 여전하게 이어진다. 그럼에도 새해맞이라는 기분을 스스로에게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사사로운 일들을 뒤로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하루를 원한다. 붉은 말의 해라 불리는 병오년(丙午年)이다. 말의 힘찬 기운도 받아보자. 제주에 가면 눈앞에 막힘없이 무해한 풍경이 펼쳐지고 소소하던 소망은 단숨에 이루어진다.
-제주의 겨울 바다, 구엄리 염전
제주의 겨울바람은 차고 상쾌하다.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고 피부가 얼어붙는 겨울바람이 아니다. 이번 코스는 제주 서쪽이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고 파도가 철썩이는 구엄리 돌염전은 제주 서쪽의 독특한 풍경을 가진 전통 염전 유적지다. 제주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보기 좋은 위치이기도 하다. 공항에서 10분 남짓 해안도로를 달리면 길옆으로 나타나는 바다엔 대부분 제주의 바닷바람을 맞으러 온 여행자들이 서성인다.
제주 애월의 구엄리 염전은 다른 지역의 염전과는 달리 암석해안 암반을 이용하여 해수를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던 곳이었다. 바닷가에 쌓인 돌들 위에서 소금이 결정되는, 신기하고 신비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과거에는 마을 사람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는데 이제는 제주의 귀중한 문화유산이고 여행지로 자리 잡았다.
염전 앞에서 내려다보는 구엄리 염전에는 돌염전과 파도를 배경 삼아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여행자들이 염전을 오간다. 특히 애월 해안도로가 지나는 드라이브 코스여서 지나던 이들이 잠시 차를 멈추고 한 번씩 들르기도 하므로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 앞에 돌염전의 유래와 생산 등을 설명한 안내판이 친절하다.
구엄리의 돌염전을 제주 말로 소금빌레하고 하는데 이는 소금밭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명종 14년에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명맥이 이어져 구엄마을의 돌 소금밭으로 생계유지했다고 하니 이 또한 돌염전의 의미가 크다. 제주에서 보기 드문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염전을 향해 세찬 파도가 치고 나간다. 돌과 바다, 하늘이 만들어 내는 구엄리 돌염전만의 풍경이 시원하다.
-겨울 감성, 애월 한담해변 해안 산책로
애월읍 한담해변은 검은 현무암 바위로 비취색 바다 물빛이 반짝이는 곳이다. 마을을 걷다가도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가 얼굴이나 손에 튀기도 하는 건 한담해변만의 즐거움이다. 마을 산책로에는 예쁜 카페나 기념품 가게가 많아서 이 또한 볼거리다. 카페 거리의 이런 현대식 건물 사이로 눈에 들어오는 전통식 초가집이 있다. 조선시대 해양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표해록'의 저자인 녹담거사 장한철 선생의 생가다.
제주 전통가옥 구조로 복원되어 안거리와 밖거리 2동이 지어졌다. 해양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표해록을 디지털화해서 잠깐씩 들여다볼 만하다. 한담해변에 갔다가 '제주 선비 장한철의 표류 이야기'를 보고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남는 여행이다.
장한철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애월읍에서 태어난 문인이다. 대과를 위해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던 중 풍랑으로 류쿠제도(오키나와)에 표착, 그 경험담을 표해록으로 저술한 인물이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에는 하멜이 있었다면 제주도엔 장한철이 살았다는 것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가와 장한철의 이야기가 있는 한담해변 산책로는 제주 올레길 15-B 코스가 지나는 아름다운 해변 길이기도 하다.
-제주 한경면 낙천의자마을, 순례자의 교회
제주 한경면으로 향한다. 한경면의 낙천리라는 마을은 하늘에서 천 가지 기쁨을 내려주었다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현재는 낙천 아홉굿마을이 생겨나 더 알려졌다. 한동안은 인적이 드물던 마을에 천 개의 의자가 공원을 채웠다. 낙천의자마을이라는 명칭답게 의자를 테마로 하는 다양한 모형의 의자들이 자연 속에 어우러져 독특한 멋을 내는 공간이다.
하고많은 조형물 중에 하필 어째서 의자 마을일까.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라는 글귀가 쓰여있는 입구의 의자가 아니어도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려는 마음을 전한다. 바쁘다를 외치며 사는 사람들 틈에서 의자 마을에서만은 어디서든 마음 편히 앉아 쉼을 주는 역할을 하는 공원이다. 의자 마을의 드넓은 공원에서 자연풍광과 어우러지는 무수한 의자를 바라만 보아도 푹 쉬었다는 느낌이다.
한경면을 지나면서 꼭 들러보아야 할 곳 중에 순례자의 교회가 있다. 요즘은 교회든 어떤 장소든 규모가 커지고 있는데 순례자의 교회는 마냥 작다. 순례자의 교회는 제주에 두 군데 있고 강화도 교동도에 세 번째로 세워졌다.
제주 올레길 13코스를 지나다 보면 들판에 자그마하고 이국적인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라고 알려진 순례자의 교회다. 3~4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에 성경책과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딱히 예배 시간이 정해 지지 않고 종교와 상관없이 지나는 여행자나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잠시 들러 명상이나 묵상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장소다. 교회 탑에 새겨진 '길 위에서 묻다'라는 한 줄 글이 걸으면서 생각해 보게 한다.
-마음의 울림을 듣다,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
제주에는 올레길과 둘레길만 있는 게 아니다. 묵상 순례하면서 성찰하는 순례길이 있다. 그중 제주 서쪽 끝 고산성당에서 시작되는 ‘빛의 길’이라는 이름의 김대건 길이 있다. 순교자들의 자취가 스며있는 바다와 섬과 산과 포구에 가 함께 하는 여정에 천주교 용수성지 성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기념관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여느 제주 관광지와는 달리 한적하다.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200여 년 전 한 사람이 태어났고, 한국인 최초로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8월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던 중에 풍랑을 만나 28일 동안의 표류 끝에 제주도에 표착했다.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내 나라 땅을 밟았으니 그 감격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날이 마침 주일이었고 함께 온 일행들과 차귀도 해안가에서 한국 사제 최초의 미사 봉헌과 성체를 모셨다고 전한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이곳 용수리포구를 성지로 선포하고 포구 앞에 김대건 표착기념관과 기념 성당을 건립했다.
표착기념관 바깥의 야외 정원에서는 당시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고증·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용수성지는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보다 자신을 다 바쳐 그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하고 보여준 곳이다. 외국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 사제가 되어 돌아왔으나 내 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끝끝내 군문효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깝고 안타까운 젊디 젊은 25세였다.
제주 표착기념관은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해안가에 그분의 의지를 담아 기념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다. 김대건 신부님이 중국에서 타고 온 배 모양을 본뜬 기념관 건물 내부는 소박하다. 기념관 1층에는 순교자들에게 형벌을 가할 때 사용하는 각종 고문 형구가 전시되었고, 2층 김대건 신부의 흉상, 옥중서신, 업적 소개와 순교 정신, 천주교의 역사 등을 보여준다. 기념관 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오기까지 험난했던 과정이 생생하다. 전시품들과 억압당하던 당시 사용했던 도구들만 보아도 천주교의 탄압을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하는 생각을 들 정도다. 그분들의 치열했던 삶과 그런 역경으로 지금껏 천주교가 자리 잡았고 천주교의 역사도 이렇게 전해지고 있구나 싶다.
기념관에서 마을 쪽으로 나가면 부둣가엔 오징어가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는 풍경을 보게 된다. 바다를 향해 널어놓은 한치와 오징어가 투명하게 해풍에 마르고 있는 풍경을 분명 수십 장 찍었는데 폴더로 옮기던 중 모르는 사이 모두 사라진 걸 뒤늦게 알고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며칠 동안 원통했지만, 내년 이맘때 다시 가서 찍어올 생각이다. 오징어가 마르는 풍경도, 순례길 따라 걷고 차귀도가 평화롭게 떠 있는 앞바다에 노을이 내리는 것도 볼 겸.
선착장 옆으로는 한치와 오징어 즉석구이 상점들이 늘어서 있어서 구운 오징어 하나씩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본다. 시간이 가능하다면 해가 질 녘 감동적인 일몰을 빠뜨리지 말 것.
드라마 '청년 김대건' 스틸컷
한국 가톨릭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의 신부 이야기는 2022년 영화 '탄생'으로도 제작되었다. 배우 윤시윤이 김대건 안드레아 역을 연기했고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된 사도 요한 안성기 배우는 역관 유진길 역할로 출연했다. 그리고 2025 연말 성탄절 특집으로 3부작 TV 드라마 '청년 김대건'이 방영되었다. 단순히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닌 한 인물의 서사를 통해 우리의 삶 또한 새롭게 생각해 보는 마음의 울림을 듣는 기회였다. 표착기념관과 성당이 있는 용수성지는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조용히 걸어볼 만하다. 여행 중 마음의 쉼을 얻는 시간이다.
이제 잠깐 해안가를 향해 달리며 마무리해 보자. 제주 바다는 많이들 알려졌는데 아직도 모르고 지나치는 곳도 무수히 많다. 제주 바다 기찻길은 정식 명칭이 아니다. 서귀포 대정읍 해안길 옆 바다로 뻗어나간 기찻길인 듯한 게 보인다.
얼핏 마을에서 바다로 연결된 철길처럼 보이지만 해녀들이 물질할 때 장비를 옮기는 작업용 수레길이라고 한다. 멀리서 보면 저 철길 따라 바닷속으로 기차가 들어가는 길인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철도도 아니고 가벼운 철제로 만들어진 수레길일 뿐인데 요즘 감성 사진 명소로 알려진 모양이다. 감성 사진을 담느라 꽁냥 거리는 커플들을 흔히 본다. 시원한 겨울바람 속에서 잠시 제주 바다를 마음껏 느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