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호수 옆을 지나는데 떨어지자마자 호수의 물과 하나 되는 비가, 투명하게 친근감을 주는 상큼한 기호로 다가온다. 버스 안이 아니라면 빗속에 뛰어들어 흠뻑 비를 맞고 싶다.
저 빗속에 들어가면
나도 비와 하나 될 수 있을지….
비는 실처럼 가는 모습으로 떨어져 실비라 불리지만 한 줄기씩 잘 따져보면 유연한 것만은 아니다. 내려오면서 물러서거나 우회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는 직선코스의 날카롭고 저돌적인 자세다.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내리는 비는 글자인 비와 닮았다. 이슬비가 내리는 날은 비, 장대비가 내리는 날은 비다.
버스는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다.
버스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비는 성급함이 없다. 그렇다고 버스를 놓치는 건 절대 아니다. 비는 키 큰 소나무와 키 작은 채송화, 달리는 버스의 유리창에 균등하게 떨어진다. 나는 그렇게 내리는 비가 좋다. 막무가내로 퍼붓는 비에 비하여 심연으로 스며드는 자세로 세상을 기품 있게 싸 안기 때문이다.
버스가 잠시 멈추었다.
창가에 기대어 비와 식물이 만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비는 들풀을 조심스럽게 건드리며 이파리 끝에다 작은 물방울을 만든다. 물방울을 머금은 강아지풀과 금잔화의 몸짓이 비의 리듬에 자신의 행동을 맞춘다. 비가 잔잔한 가락으로 내리니 식물의 몸짓도 작고 귀엽게 흔들린다.
‘리듬 맞추기’ 연습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식물이 비의 선율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 수 있는 기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들은 생래적으로 자연自然을 업고 있어서 연습이 필요치 않는 것일까. 그에 비하여 머리와 가슴을 한껏 열어놓거나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열중하여야만 겨우 호흡이 맞춰지거나 끝끝내 그렇지도 못하는 인간의 한계가 왜소하게
느껴진다.
버스는 다시 달린다.
버스의 목적지가 있듯이, 비도 목표지점이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가뭄이 들 때, 비의 가늘디가는 몸매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나무의 뿌리를 축이는 게 최종 목표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비는 뿌리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우수에 어린 듯, 무언가 음미하는 듯, 조용히 내려간 비는 메마른 흙과 뿌리를 축이고 있을 거다. 비린내 나는 물기를 털어내고 향기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뿌리를 감싸줄 것이다. 뿌리 주변에 흩어져 있던 양분까지 모아서 뿌리에 전해주고 줄기로 올라가 나무에 생기를 줄 것이다. 사명감으로 나무를 보호하는가 하면 그들과 친화하여 하나가 되어 있을 거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하나 되어 움직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비는 이것을 필연으로 여기며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실행한다. 이것이 부쟁不爭의 덕과 낮은 곳으로 임할 줄 아는, 물을 본질로 하는 비의 장점이다.
비같이 낮은 곳으로, 무욕으로 ‘스며드는’ 인생이길 소망해본다.
때로, 자신의 결에 맞지 않은 기류가 자신에게 투영될 때 - 하고 싶지 않은 일이나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동이라 한다. 여성성이 없는 아버지가 육아를 담당하거나, 글을 쓰거나 대화를 할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언어가 돌출하여 부자연스러움이 생겨나고 거기서 오해가, 오해는 또…, 예기치 않던 파문을 불러와 역류의 물살을 타는 건 자신도 힘겹겠지만 사회 전체로도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비는 역류하는 삶을 모른다. 비가 아닌 비는 성급한 삶도 그리지 않는다.
비를 담은 차창은 달리는 화폭이다.
화폭 속으로 자연스레 그려지는 비는, 허공을 채우는 것 같기도, 퍼내면서 자기를 비워내는 것 같기도 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비의 몸짓이 노자의 도덕경 중 한 구절을 떠올린다.
도는 그릇처럼 비어,
그 쓰임에 차고 넘치는 일이 없습니다.
심연처럼 깊어,
온갖 것의 근원입니다.
비가 더 좋은 것은 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비는 부담스럽다. 비의 결로써 낮은 자세의 언어가 쌓이길 원한다.
비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