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감 파는 가게

- 제인과 스티븐

by 예나네

여기에 와서 재봉틀을 배운 적이 있다.
틀질이라곤 실도 못 거는 초보도 안 되는 수준이었고, 거기다 영어까지 잘 못 알아듣는 내가, 서양 사람 속에 든 지식을 잉글리시로 배운다는 게 가당치도 않음을 알면서도, 이미 그 클래스에다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낯설고 날 선 삶에 대한 두려움과 설움이 목까지 차올라 있던 때여서, 어디라도 적을 두어야만 했으니까.

색색의 옷감이 진열된 가게에 아기 코끼리 무늬 천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발견했을 땐 기분이 묘했다. 호주의 시골 하고도 이 작은 가게까지 찾아온 옷감, 그리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은 인연을 만난 듯 그 옷감에서 특별한 온기가 묻어 나왔다.


출처 : spotlight.com.au


메이라는 웃음기 많고 친절한 선생은 나를 가게 뒷방으로 데려갔다. 커다란 탁자에 둘러앉아 색색의 천을 재단하여 틀질을 하던 서양 여인들 대여섯 명에게 나를 소개했다.

어떤 할머니는 보라색으로 퀼트 이불을 짓고, 한 곱상한 레이디는 연두색을 베이스로 한 색색의 꽃신을, 또 어떤 이는 손수 만든 인형을 손주에게 준다며 브라운색 곰 인형에다 까만 눈알을 붙이고 있었다. 조이라는 할머니는 나를 보자 대뜸 임자 만났다는 듯 '잘 가'가 잘게 적힌 한국말을, 낡고 얇은 스토리 북에서 꺼내놓고 이게 어떻게 말하는 말인지 묻기도 했다. 여인들은 조그마한 공간에 앉아 오손도손 모여 현실을 깁듯이, 한 땀 한 땀 실용품을 짓고 있었다.


출처 : spotlight.com.au



자기들만의 고인 세계에 낯선 동양인 여자가 들어갔는데, 다정하게 반기는 분위기여서 다행이었다. 그녀들에게서 옷감의 질감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감싸고, 튀는 듯 튀지 않는 고유의 감응들.




그다음 주 수요일부터 두 딸이 사준 재봉틀을 들고 출석했다. (여긴 수강생들이 각자 자기 재봉틀을 들고 간다. 체격이 연약해 보이는 한 여인은 올 때마다 남편이 재봉틀을 들어다 준다. 난 그 광경을 구경거리인 듯 흘금흘금 보곤 했다. 남자가 조용히 와서 재봉틀을 탁자에 얹어놓고 말없이 고요히 물러나곤 하던 모습이 볼수록 인상적이어서.)

가게 주인 제니와 오랜 친구라는 메이는 실력 있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눈치까지 빨라서 언어가 궁색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면서도 세심하게 가르쳤다. 내가 그녀의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다른 쉬운 용어로 바꾸든지, 직접 재봉틀을 박아주는 시범을 보여주면서 나를 옷감 잇는 동산의 푸른 초장으로 잘 이끌어갔다.

수강료는 10시부터 12시까지는 $20이고, 오후 3시까지 $30이라 하여, 나는 3시까지 배우는 종일반을 택했다. 부드러운 천을 만지작대며 차르르르 재봉질을 하는 이 따스한 공간에서, 그들과 차를 마시고 점심을 나누어 먹다 보니 금방 친해졌다. 색색가지 천조각 닮은 우리 클래스 매이트들의 속정이 시나브로 알록달록 물들어가고 있었다.


때로 아줌마들끼리의 웃기는 이야기로 푸하하하, 호호호, 깔깔깔 대며 아지매들 특유의 마음 퀼트를 누비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100%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소외감이 들지 않았다. 메이가 조용조용 좌중을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압도하고 있었다.


가장 쉬운 직선 박음질을 차르르르륵, 내가 빨리 박아대니 제니가 나보고 고속 티켙 끊었느냐며 농을 건네기도 했다. 또 메이는 내가 퀼트 무늬의 네모를 망가뜨리지 않고 정밀히 각을 잘 맞춘다고 다른 수강생에게 보여주면서 내 퀼트 잇는 솜씨를 칭찬을 했다.

그다음 주부터 멤버들은 내가 가면 허그를 해주고 잘한다고 추켜올려 주면서 새 클래스 메이트인 나를, 앞다투어 친밀하게 보듬어 주었다. 점점 수요일이 기다려지는 날이 되었다.
하나둘씩 내가 누빈 작품? 이 늘어갔다.
둘째 딸 벽걸이, 큰 딸네 쿠션 커버, 태어날 외손주 행복이의 이불 두 개, 나의 집 쿠션 커버, 우리 가족의 가방들... 하나하나 완성되기 전의 설레는 기분은 봄소풍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소녀의 마음 같았다. 어떤 날은 밤을 꼬박 새워 재봉틀 찰찰찰 돌리는 날밤 새는 밤도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늘 오는 키다리 아저씨는, 우리가 있는 곳을 무연하게 지나쳐서
조금 어수선하게 놓인 탁자에 앉곤 했다.



그 위엔 가위나 천조각 같은, 우리들의 소품들이 흩어져 있어서 식탁이라 하기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키가 190센티는 돼 보였고, 얼굴이 하얗고, 준수한 외모의 그는 그저 고요히 그 자리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나가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게 여주인 제인의 남편, 스티븐이라 했다. 틀질이 취미라던.


이 가게 진열장에도 여느 옷감 가게처럼 알록달록한 퀼트 이불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무늬를 디테일하게 재현해놓은, 아기자기하며 알록달록하고 프리티 한, 어느 퀼트 이불 앞에서 예술작품 감상하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때 부드럽고 푸근한 인상의 제인이 조용히 내 옆에 오더니 싱긋 웃으며 "이거 내 남편이 만들었어." 했다. 자기 남편이 재봉틀 하는 걸 좋아해서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재봉틀에 매달려 있었고, 그래서 이 가게까지 오픈했다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휘청휘청하던 키다리 아저씨가 재봉틀 앞에 앉아서 이불을 만든다는 게 상상이
안 갔다.


알고 보니 스티븐은 옷감 가게 안쪽에 위치한,
소위 잘 나가는 정신과 병원의 원장이었다.
날마다 슬그머니 들어와 소박한 점심을 먹은 후 스르르르 사라지곤 하던 스티븐, 그 퀼트 이불 박사인 의사 선생이, 다음부터는 다시 보였다.


제인과 스티븐.
그들 둘 사이엔 네 명의 딸이 있다고 해서 내가, 너네 딸부자여서 좋겠다, 그렇지. 했더니

제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 홍, 우리 재혼 커플이야. 두 딸은 스티븐의 아이이고, 두 딸은 나의 아이야. 하며, 마치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히 길 가르쳐주듯 대수롭지 않게 말해주었다.


나는 이 가게 안을 채워가는 여인들을 비롯하여 이 사람들의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그저 사람 사는 세상의 한 좋은 표본 같이 느껴졌다.
출처 : spotlight.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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