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독은 꽃처럼 피고,
주말엔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내 집이 아니다. 나의 집에서 1270km나 멀리 떨어진 딸 내외와 10개월 3주 차의 외손자가 사는 집이다. 난 이곳에서 반년 하고 이레째 살고 있다. 외손자를 ‘돌봐주러’ 왔는데, 요즘은 아기랑 외할미랑 죽이 잘 맞아 ‘서로 돌봐주고’ 있는 격이다.
아기가 어느 날 문득 걸음마를 시작하듯, 아기는 불현듯 누군가를 선호한다. 그 사람이 이 할미라니. 달포 전부터 재영이가 제 부모보다 할미를 더 따르게 되었으니 할미로서 분명 반가운 일일 터.
그럼에도 할미는 주말이 고독하다. 휴일 날 가족이 있는 지인을 만날 수도 없고, 딸도 신랑이 있으니 자기들끼리의 자유를 허하는 마음으로 나는 딸 집을 쑥 빠져나온다.
명색이 작가니 글 쓰고 책 읽으려 집 나서는 이유를 대지만, 막상 딸 집의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춥고 막막하다. 열쇠를 깜빡 잊고 나오더라도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기엔 이미 글렀다. 그땐 더 춥고 쓸쓸해진다. 엷은 봄옷 사이로 꽃샘바람이 싸하고 스친다. 내 안에서 봄꽃 대신 고독의 꽃이 피어난다.
* 꽃처럼 지고,
다행히 딸 집 근처에 북 카페가 있다. 벽을 향해 한 사람씩 앉게 되어 있는, 어느 사이 내 책상이 된 카페 탁자에 앉아 폰을 연다. “고독 –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다가, 전자책 ‘페이퍼’에서 카뮈의 스승 장 그르니에 에세이 『일상적인 삶』 중 「고독」을 클릭하여 읽는다.
"감옥에 갇힌 실비오 펠리코는 거미 한 마리를 길들이며, 발자크의 소설 『사막에서의 정열』에서 암사자는 그의 주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뿐이랴, 숲, 바다, 산도 우리 곁에 있다. 결코 우리는 혼자가 될 수 없다”는 글에 눈길이 머문다.
작가는 또 고독이라는 계절 속에 스스로를 가둔 예술가 셋을 불러들인다. 사드와 몽테뉴와 마키아벨리. 그들은 고독을 생의 씨앗처럼 품고 고이 매만지고 있었다. 사드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담배 마는 종이에다 은밀히 글을 써서 가발 속에 돌돌 말아 숨겨놓는다. 몽테뉴는 서재에 홀로 칩거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한다. 관직에서 물러난 마키아벨리는 별장에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살며 고전과 시 읽기에 몰입한다.
은밀하거나 칩거하거나 세상과 담을 쌓아 고독 속에 빠져 다만 한 곳을 응시하던 그들의 영혼은 내게 자유로 다가왔다. 그들은 존재에게 지워진 고독의 두께를 조금조금 아주 조금씩, 엷어지게 벼려가는 중이었다. 나무에서 꽃잎 떨어지듯 그들에게서 고독의 꽃잎이 하나하나 지고 있었다.
꽃 진 터엔 열매가 움틀 터.
* 열매처럼 무르익는다.
고독이 무르익어 나온 글은, 잘 익어 먹기 좋은 열매처럼 읽기도 좋다.
“산에 올라와 사는 게가 있다. 게가 산에 올라가 구멍을 뚫고 사는 것을 보면 엉뚱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실은 그것이 매력이다. 왜 그러느냐고 게보고 물어볼 일은 아니다. 그것은 나보고 물어볼 일이다. 나는 집을 떠나 멀리 바닷가에 와있고 게는 바다를 떠나 산에 와있고 이것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이생진 시인이 구순이 되셨단다. 선생이 1955년부터 이제껏 출간한 시집 서문과 후기 모음집인 『시와 살다』 에서 본 이 글귀가 편안하고 좋았다. 그래 나도 어느 주말부터는 교외선 기차를 타기로 했다.
교외선은 도시로 들어가는 길과 다르게 숲과 강과 호수와 절벽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3층 차창으로 들어오는 숲이 밀림처럼 깊다. 눈에 닿을 듯 가까이서 본 , 석벽에 남은 단층의 흔적은 시간이 쌓아 올린 예술이다. 팔당대교 닮은 브리지 너머 강은 드넓고 푸르다. 해가 뜨니 강의 금물결, 숲의 은물결이 눈부시다 못해 황홀하다.
'피셔스와프' 앞에선 주말 3시에 펠리컨 보호사인 여인이 먹이를 준다. 커다란 생선 대가리가 넓다란 새의 저 주둥이로 단숨에 들어가 목에 곡식자루처럼 척 걸려,새들은 부자가 된다.
강가의 워이워이 역에서 내리니 동양인 남성이 목재다리에 서서 월척을 하고 있다. 대어가 절박하게 퍼덕거리고, 남자는 기쁨의 기운을 뿜고 있다. 그는 밤새 기다리던 고기를 낚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월척이 내심 부럽다. 질투심이 살랑이며 머리가 지끈 아프다. 낚시꾼은 하룻밤만 기다려도 이렇게 대어를 낚는데, 이 글꾼은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단 한 마디의 언어도 낚지 못하였으니 실망감이 더해져 더 고독해진다.
다시 타인의 글가에서 글을 기다리기로 하고, 공원 벤치에 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펼친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서 우리의 공감이 이끌리는 사람은 호화로운 집에 사는 마담 드 뉘싱겐이 아니라, 더러운 하숙집에서 근근이 실아가는 이빨 빠진 고리오 영감이다. 하디의 『미천한 주드』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은 옥스퍼드의 연구원들이 아니라, 대학의 석상을 수리하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석공.”이라 말하는 보통은, 명예와 권력과 물질적 관념에 사로잡힌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는 예술가의 저항을 증명해낸다.
나는 글마다 대어를 낚는 보통의 책을 덮고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런데 내 언어의 찌는 언제 흔들리려나.’
'엄마, 어디야? 빨리 와. 엄마가 좋아하는 국수 삶아 놨어유.’
하는 딸의 문자가 찌 대신 뜬다.
돌아가는 기차에서는 미끈하고 잘 생긴 나무보다 등 굽고, 벌레 먹히고, 어부의 손처럼 투박하고… 미천한 사물들에게 눈길을 줘봐야겠다.
* 계간 <에세이포레> 2019. 봄.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