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주네 4층 계단 앞에서 헛걱정을 했다

by 예나네
요즘 20개월 차 재영이에게 놀라는 게
꽤 많다.

핸드폰으로 보던 뽀로로 동요가 끝나면 고 꼬막만 한 집게손가락을 화면에다 대고 사선을 죽죽 긋기 시작한다. 그러면 참 희한하게도 화면이 바뀌어서 새로운 동요가 나온다. 두 돌도 안된 아가가 폰을 맘대로 조정한다니, 참내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고 부모가 넘치도록 유 튜브를 틀어 주는가? 그건 결코 아닌데도.


1,2,3,4 숫자는 물론이요, A, B, C, D.. 알파벳까지 다 안다. 믿거나 말거나, 한두 번 가르쳤는데 바로 알더라나. 발음은 어중 뜬데 가리키는 글자는 아주 정확하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재영이라서 10여 가지 자동차를 종류별로 이름을 착착 다 알고, 자동차가 하는 일을 꼬막 손짓과 꼬물꼬물 입술로 술술술 그려 놓을 때면 외할미 입에서 "아이고, 우리 외손주 박사님"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 지 아빠가 가만히 와서 재영이한테 조근조근 물어보며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닳도록 쓰다듬다 슬그머니 나간다.





그 무엇보다 나는,
재영이와 마흔일곱 계단을 두 손 꼭 붙잡고 오르내릴 때가 젤로 신기하고 뿌듯하다.


재영이네 집은 오래된 4층 유닛이라 엘리베이터가 없다. 작년 이맘때 재영이가 10개월도 안됐을 즈음, 재영이 부모는 단층집으로 옮겨보려고 휴일이면 재영이를 들쳐 안고 집을 보러 다니곤 했다. 재영이가 더 자라기 전에 집을 바꿔야 한다고.



그런데 이들이 살고 있는 이 집, 재영 아빠가 숫자 2*을 좋아해서 스트릿 넘버도 2*이고, 유닛 호수도 2*이고 자기 생일도 2*일이라서 구입했다고 한다.

- 말은 그렇게 해도 유닛 앞 대숲을 비롯하여 4층 유닛 높이를 훨씬 능가하고 파란 하늘까지 든, 키 크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휘청휘청 흔들리고, 그 하늘거리는 가지 위로 새소리 바람소리 째재잭, 휘휘휘 새어 나오는 도심의 숲 같은 . 트레인 스테이션이랑 쇼핑센터 가까운 거리. 그래서 이들과 이 집이 인연 지어진 듯싶다.

또 하나의 시크릿 스토리는, 모르긴 해도 3년인가 그 기간 동안 이들이 연애할 때, 내 딸은 4층의 이 집을 물레방앗간처럼 오르내리며 지금 내 사위가 된 재영 아빠랑 콩닥콩닥 음식도 같이 해 먹고... 온갖 것을 했으리렷다. 그러니 불편하더라도, 이 집을 선뜻 박차고 나가긴 내키지 않을 터.


여하튼 계단을 아기 데리고 오르내리느라 불편한 이 집에 정이 폭 들었는지, 머니가 부족한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니, 이때껏 집을 못 바꿨는지 안 바꿨는지도 난 확연히 알 수 없다. 그저 내 딸과 사위가 지 새끼 잘 보듬고 오손도손 오누이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이쁘고 대견하기만 하다.

그나저나, 사실 난 재영이를 돌보러 오기 두어 달 전부터 어깨와 팔, 그리고 나의 홀 바디가 염려되긴 했다.


이번에도 4층까지 재영이를 안고,
계단 오르내릴 일이 제1순위로 무서웠다.


난 워낙 10여 년 전부터 오른팔과 어깨가 쑤시고 아프다. 그 팔로 작년 6개월 동안 13킬로이던 우리 재영이를 보듬어 안고 자그마치 47 계단이나 되는 그 가파른 높이를 또다시 오르내릴 일을 떠올리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제 재영이 몸무게도 늘었을 텐데... 그간 이 할미 몸은 7개월 전보다 더 삭았을 테고.' 생각하다니 뭔가 건강식품을 몸에다 챙겨 넣고 야 할 것 같았다. 그래, 할미는 보약 한 재 거뜬히 지어먹은 몸을 비행기에 싣고 재영이네 집으로 훌~ 쩍 날아서 왔다. 재영이 안고 먼 계단 기꺼이 오르기 위하여도. ㅎ



그런데 할미의 걱정은 기우였다.


재영이가 할미손을 꼭 잡고, 한 계단 한 계단, 고 작은 발을 꼬막꼬막 디뎌서 아기 산처럼 높은 계단의 저 끝에서 이쪽 끝까지 거뜬히 오르내린다. 재영이도 계단 밟는 일이 재미있는지 고 작은 아기 발로 제 온몸을 도장 찍듯 또각또각 계단을 딛고 오르내리는 게 얼마나 귀엽고 이쁜지.


이건 정녕 할미의 득템이다.


할미랑 재영이랑 이렇게 날마다 한 번 이상을, 손 꼭 잡고 마흔일곱 계단 오르내린다는 이 현실. 폭신하고 새하얀 뭉게구름에 포옹 꿈속 같은.



이보다 더 효율적인 운동이 또 있을까 싶다. 외손주와 둘이서 매일 아흔네 개의 계단을 딛고 집을 나서고 공원까지 산책하니, 두 사람의
맘과 몸이 얼마나 복 받은 일인지.


할미랑 두 손을 꼭 잡고 이렇게 하루 한 번 이상씩 47계단을 내려가서 공원이나 쇼핑센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또 이 계단을 딛고 올라 와 첨벙첨벙 재영인 목욕을 즐긴다.


8개월 전에 기어다니던 장소에서 이젠 뛰어다닌다.


8개월 전에 즐겨하던 까꿍놀이를 여전히 좋아한다.
재영아, 고마워.

네가 바로 외할미의 보약인데
할미가 괜한 헛걱정을 했구나.
너로 인해 어깨 아픈 게 낫는데.
즐겁고 기쁜 마음이 곧 보약인데.
우리 남은 시간도 재미있게 놀자꾸나.
사랑스러운 나의 외손주. ♡



* 예나네의 브런치 북, "외손주의 별 게 다 이쁜 외할미"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브런치 북은 예나네의 매거진 중, "외할미의 육아일기"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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