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몸은 생명을 들이고 사멸을 밀어낸다.
도토리묵 표피같이 도르르 말린 껍질들이 줄기에서 대롱거리다가 툭툭 떨어진다. 그리곤 내 발 밑에서 바삭거린다. 가지런한 이끼같이 정연해진 나무의 맨살을 처음 본 날, 내 몸은 전율이 돋았다. 껍질을 벗어던진 나무의 몸이 멀리서 볼 땐 수채화처럼 환하고 매끈했는데, 가까이 서보니 수두자국이 총총 박혀있었다. 얼마나 고된 홍역을 치렀기에 온몸이 이토록 얽었을까. 차라리 투박한 껍질로 상처를 가린 굴참나무를 보는 쪽이 마음 편할까.
켄모아 마을에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유클립투스 나무.
껍질을 기억처럼 벗겨낸 나무의 몸체가 낮달처럼 희다.
나무가 스스로 껍질을 벗는다는 건, 참신함을 발현하는 시적 몸짓이리라. 기억을 숙명으로 껴안는 인간들처럼, 묵은 껍질을 지체처럼 여기는 뭇 나무들의 몸짓은 매너리즘이다.
껍질 속에 숨겨두었던 우울과 음울 그리고 멍울을 삶의 고백처럼 하얗게 드러내고 서 있는 유클립투스. 부스럼만 한 잔 껍질까지도 완강히 떨어 버리고, 발레복 입은 듯 말끔한 우아미로 시작하는 이 나무. 발레리나의 고단한 발바닥처럼, 아직 투박한 티를 못다 벗은 밑동에서는 갈색 진액이 찐득하게 흘러내린다. 나무의 피눈물 같다. 자기를 스스로 벗는다는 게 어지간히도 고단한 작업인가 보다. 그래, 아직 벗어야 할 껍질이 남아있다는 건, 그 안에 희망이 거주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리.
그러다 나무 한 그루는 생의 한 복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허공에 시적 습작을 수백 년 반복하다 하얗게 말라 들어갔다.
숲 한가운데에 풍만한 몸체로 서서 동물성의 포성을 포효할 것 같던, 야성을 겸비한 유클립투스 - 메마른 껍질을 독소처럼 게우고 뱉어내다 몸속까지 하얗게 말라, 선 채로 죽은 강대나무가 되었다.
이 숲에 들 때마다 나는 강대나무의 비장미와 맞서 보려 하지만, 존엄까지 갖춘 나무의 기氣에 압도당하여 그 몸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숲을 되돌아 나온다.
쌓이는 시간 속으로 제 가지 몇 개 더 가지 쳐 하늘에다 뉘고, 그 가지에 때처럼 낀 마른 껍질들 밀어내다 서서 죽은 강대나무. 흰 빛 우뚝 빛나는 저 강대 나무. 수수한 감동을 넘어 숭고미에 들어있다. 온몸 올올이 하얗게 굳은 강직한 입상立像으로 서서, 시 한 편의 능력을 능가하고 있다. 하모, 감동을 몸으로 직접 기술한다는 것은, 머리로 시를 짓는 일보다 지난한 노동이리.
북어처럼 수평으로 제 몸 바싹 말린 강대 나무는, 갈참나무의 속살같이 난만한 수직의 결로 갈라져 있었다. 그 미립의 결 사이로 햇빛과 바람이 숨어들고 있었다. 그곳은 빛의 집이고 바람의 안식처였다. 뭉텅한 가지 속엔 새들이 머물 동굴이 뚫려 있었다.
‘이삭 줍는 여인’의 굽은 등에서 튼실한 노동력이 느껴진다면, 천천히 메말라가는 몸매를 죽을 때까지 스스로 매만져 양각과 음각으로 입체감의 조화를 이룬, 이 강대나무의 몸체에서는 거룩함이 전해져 온다. 초록으로 일렁이는 주변 숲을 아우르고, 흰 고요로 서서 견고한 내면의 절제미를 묵언으로 수행하는 강대나무. 사람들이 서서 죽은 이 나무를 베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새들이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몸속까지 샅샅이 순백으로 표백하다 선 채로 메말라 간 강대나무. 한창 물이 오른 나무라도 오래 서서 몸을 지탱하기는 버거웠을 텐데, 죽어가면서까지 빛과 바람 그리고 새들의 집이 되자니 스스로 자청했을 고단한 노고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고단한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나무의 고매한 헌신에서,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레니의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가 연상되기도 한다.
어느 날, 브리즈번 시내 한 복판에서 얼굴과 온몸에 새하얀 물감으로 칠한 채 꼼짝 않고 서 있던 키 크고 근육질 팽팽하던 동물성의 한 사내, 그는 이 강대나무의 은유였던 것 같다.
이 강대나무처럼, 속에 있는 가장 소중한 색채 하나 자신 있게 꺼내어, 허공에 쓴 시 한 줄같이 세상 속으로 띄우면 어떨까. 가장 나다운 나만의 부끄러움까지도, 시처럼 허공에다 부려 쓰면 어떨까. 순백으로 서서 죽어, 죽어서도 생명을 감싸 안는 저 강대나무가 표현하는 생의 숭고를, 흉내라도 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