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시작한 비는 지금도 내린다.
그저께 우리 집으로 옮겨온 붉은 고추들은, 나의 베란다에서 아직까지는 안전하게 누워있다. 블라인드가 갑옷처럼 방패막이되어 비를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하는 게 생물인지라, 온전히 마른 고추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고추의 운명은 고추 자신도 알지 못할 테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붉은 열매들은 태어난 가지에 붙어있었다. 며칠 후면 마켓에서 제 몸값을 톡톡히 받을 꿈을 꾸고 있었을 게다.
그러다 열매는 시간을 놓쳐버렸다.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축포같이, 강렬히 내리쬐던 고온의 태양열 때문이었다. 고추밭의 기온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도, 태양의 열기가 조금만 덜 내려앉았어도, 고추는 그토록 일찍 늙어버리진 않았을 게다. 지금쯤 이 붉은 열매들은 제 몸값을 치른 누군가의 부엌 팬트리에 얌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텐데.
비는 아직 그칠 맘이 없다. 그렇다고 붉은 고추가 불안한 건 아니다.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 함께 나란히 누워 자기들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평온할까.
나만 불안하다. 내일은 날씨가 개어야 할 텐데. 고열의 태양이 최대치로 이글 이글대며 붉은 고추를 향해 축포를 하루종일 터트려야 할 텐데.
베란다 귀퉁이에 앉아 붉은 고추를 쓰다가 고개를 들어본다. 여전히 잿빛하늘이다. 블라인드 바깥 담장에서 꽃을 지닌 꽃의 가지들만 온통 화사하다. 그러나 화사함을 고유하게 지닌 꽃이라서 그저, 화사하게 보일 뿐이다.
꽃을 땅바닥으로 내려보낸 꽃의 가지도 지금은, 빗물에 떨어져 고아처럼 비를 맞고 있는 제 꽃잎들이 불안할 것이다. 꽃가지도 나처럼, 태양이 구름 바깥으로 나오게 될 뽀송뽀송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터.
땅에 떨어진 꽃잎들이 반갑다. 하나의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핀다는 거, 누구도 거부하지 않을 자연의 진리를 인지하게 해준다. 꽃나무도 유한의 생명체인지라 너무 오래 내리는 비는 반갑지 않을 것이다.
맑은 시간을 같이 기다리는 동지가
곁에 있으니 좋다. 불안한 마음이 내려놓인다.
흐리거나 깜깜한 시간 속으로 환한 빛이
찾아오는 건, 우주의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