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3. 화.
언니, 오늘 우리 팜에 잠깐 올 수 있어요?
그저께 딸과 함께 베란다에서 아침엔 식빵을 구워 딸기잼과 버터를 바른 후 살짝 볶은 버섯, 구운 베이컨, 레투스, 아보카도를 얹어 먹는데 한국인 그녀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녀의 칠리팜에 와서 망고와 고추를 가져가라 했다. 지난번에도 연락이 왔는데 패스를 했으니 이번엔 기어이 갔다.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난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가족을 다 좋아한다.
운전을 못한다던 그녀는 트럭을 몰고 한국, 일본, 태국 등지에서 온 젊은이들한테 수박을 나눠주고 있었다. 밭이 넓다 보니 걸어서는 갈 엄두를 못 내고, 쉐드에서 붉은 물고추를 골라 박스에 담던 그녀의 남편이 흙먼지를 옷처럼 입은 다른 차에다 나를 태우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솔직히 요즘엔 한국사람이 미워요.
그녀 남편은 고추팜에서 30명에서 50명의 젊은이들을 불러 아울리로 일을 시켰는데, 애석하게도 한국 젊은이들한테 실망을 한 것 같았다. 주인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다가 눈 돌리면 일의 진척이 안된다니, 투자를 하는 주인으로서 속이 타기도 할 테다.
그녀 남편은 또, 한국사람에 비하여 일본 사람들은 주인이 지켜보든 안 보든 한결같이 꾸준히 하더라고 하였다. 그날은 우리 청년들에게 단단히 실망한 듯했다. 그래서 밉다고 표현하신 듯했다.
난 할 말이 없었다. 남의 일 같지는 않았다. 그 현실자체에 자존심이 조금 긁혔다. 그럴 땐 불현듯 애국심이 발현된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온 우리 한국인 청년들이 이역만리에 와서 고생하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힘들어도, 일머리를 모르면 물어가면서 차근차근 일을 배워서 성실히 몸에 익혔으면 좋겠다. 최소한 꾀는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한국의 그 젊은이들도 누가 보든, 안보든 노력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면 좋겠다.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물론 난, 꾀부리는 청년보다 그런 훌륭한 젊은이가 더 많으리라 믿는다.
고추밭에 가보니 고추를 따서
고추를 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줄 고추를 양동이에 담고 있었다. 난 내가 주워 가면 되니까 다른 일 보라며 그녀의 통을 가져다가 두 통을 금방 채웠다. 고추밭고랑이 빨갛도록 버려놓은, 그들의 피 같은 고추를 줍고 있자니 마음이 울컥울컥 했다.
고추자체는 농사를 잘 지어놓아서 미끈하고 열매도 실하고 색깔도 이쁜 게 최상품이었다. 그러느라 온갖 노력으로 갖은 열정을 다 받쳤을 텐데 내심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연말연시 홀리데이 기간 동안에 마켓이 문을 닫아서, 고추가 너무 익어버렸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없어져서 버리는 거라고, 그녀의 아들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조금 더 많아졌다고 버린다니, 정말 내 것인 양, 아까워도 너무 아까워 가슴이 아팠다.
혹시 모르니까, 큰 냉장창고를 비치하고 있는 Bee마켙에 가서 일반 상품보다 저렴한 값에라도 팔아보라고, 그녀의 아들에게 말해보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붉은 고추가 늙으면 상품 가치가 없듯이, 사람도 그랬다.
나도 밭고랑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해 보았다. 가지를 헤치며 늙은 고추를 따보았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20분도 안 돼서 백기를 들었다. 한낮의 뙤약볕에 금방 두통이 왔다. 행여 중늙은이가 여기서 일사병이라도 걸려서 쓰러지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할 수없이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고서 그녀가 실어주는 고추 2박스와 망고 한 박스, 그리고 내가 밭고랑에서 줍거나 딴 두 통의 고추까지 몽땅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에 와서 고추를 뒷마당에 부려놓고
거의 하루종일 다듬었다.
꼭지를 따고 하나하나 닦아서 다시 햇살이 좋은 곳으로 돌려가며 널었다.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딸은 혹시 내가 몸살이라도 날까 봐 냉수와 선풍기와 수박을 날랐다. 평소 집안일엔 문외한인 그녀가 빨래도 걷어다 척척 개어 놓았으니 난 슬몃, 웃음이 나왔다. 응원에 힘이 생겼다.
그런데 걱정이다.
기껏해야 어제 반나절과 오늘 하루밖에 못 말렸는데, 내일부터 50% ~60% 비소식이 있다. 태양초 고추는 중간에 비가 오면 속이 썩어 버리기 십상인데 걱정이 태산이다.
그렇다고 내가 대신 상할 수도 없으니, 마음을 비우고, 그저 고추의 건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이틀 동안 애지중지하다 보니 정이 푹 든 고추를 하나하나 베란다로 옮겼다. 나의 아지트를 고추에게 내어주었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고추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눕혀주었다. 색 곱고 착하게 잘 마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