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한 모금 바람 한 줌이 귀한 시간

by 예나네

2023. 1. 6. 금.


고추색이 절정의 단풍잎 같다.



가을에 깊은 산색이 임계치의 색깔로 듯이 사흘 전, 정확히 계묘년 1월 3일 오후 세시부터 말리는 오늘의 고추색도 그랬다.

그 사이 하루 한나절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면 붉은색이 이만큼 어여쁘게 고이진 못했을 터, 가끔은 난감하더라도 적절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고추를 바로 이글거리는 양열 속에 널어놓으면 , 단풍처럼 붉어진 이런 고추색을 띠지 못한다. 비소식 때문에 고추는 늘로 옮겨져 이틀밤 머물러 있다 보니, 가장 절정의 색을 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 내일까지 온다던 일기예보의 비소식에 척 난감했다. 오늘부터 물컹해지기 시작하던 고추는 내일이면 희거나 검은곰팡이가 피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냉장고에서 접시의 음식만 상해도 아까운데, 다 된 고추 한 포대를 고스란히 내다 버릴까 봐 맘 졸이며 아침나절부터 뒤뜰을 들락날락하며 멀고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일기예보 한참 빗나갔다. 오후의 날씨는 내 편이 되어주었다. 잿빛 구름을 도무지 뚫지 못할 것 같던 해가 오늘 오후 두 시부터 반짝, 하니 구름 바깥에서 전지전능한 붉은 고추의 신처럼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운 좋게도 오후의 태양은 서향으로 난 나의 뒤뜰을 뜨겁게 시작했다.



불현듯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비소식으로 온전한 건조 포기상태이던 고추를 만지기 시작했다. 우선 비닐 손장갑을 끼고, 양다리가 가장 길고 가벼우면서도 잘 드는 메이드 인 코리아 가위를 들었다. 제아무리 독일제 가위라도 고추의 배를 가르는 데는 우리 국산가위가 최적이다.



쓱, 쓱, 쓱싹... 뜰에 앉아서 고추를 두세 개로 분리하는 손에 경쾌한 리듬이 붙는다. 고추 속에 아직은 연약한 씨앗들도 빛을 받으면서 점점 샛노랗고 단단하게 건조될 것이다.

앗을 볼록하게 가득 품은 붉은 열매들을 만지며 고추에게서 알을 품은 모성이 느껴졌다. 어쩌면 고추는 알을 지키기 위하여 그토록 붉은 임계의 색을 띠었는지도 모른다. 내면 가득 뿜어져 나온 찐한 모성의 색깔이기에 그토록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난 뜨거운 햇살이 아까워서 한소쿠리가 차면 준비된 멍석으로 재빠르게 옮겼다. 지금 열매는 햇빛 한 모금 바람 한 줌이 시급한 응급상황이기 때문이다. 물컹한 게, 하룻밤만 비가 더 왔어도 소생불가할 뻔했다. 고마운 햇빛 속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부채질로 응원까지 해주니 더욱 이 났다. 금은 세상 무엇도, 보다 더 귀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붉은 고추까지 다 잘라 널고 나서 땀이 흠뻑 밴 장갑을 벗으니, 그제야 손이 화끈화끈 거리고 얼얼하다. 고놈들 붉은 고추들이 보통 매운 놈들이 아닌가 보다.

손만 그런가, 얼굴도 화끈거린다. 냉장고에 놓아둔 시원한 팩이라도 한 장 붙여서 태양열에 후끈후끈 달아오른 내 얼굴의 화기를 빼내야겠다.


온 마당에 고추 마르는 매운 냄새가 사방천지진동을 한다. 매운 향이 꽃향기보다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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