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말고 맘

by 예나네


수요교실, 블랭킷 바디스에 있는데 누자가 전화를 했다.




그녀가 끊을 때까지 받지 않았다. 다행히 무음으로 설정된 콜은 교실을 소리로 휘젓지 않고 조용히 었다. 난 영어로 전화가 오면 불안하다. 행여 상대방 말이 이해가 안 되면 바디랭귀지도 못한 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버벅거리다 서로 할 말도 못 전하고 끝내게 될까 봐 두려워서다.


에도 교실을 나오면서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려움보다 반가운 맘이 더 컸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한 달 동안 자기 본국 스리랑카에서 호주로 돌아왔다고 조만간 만나자는 안부전화였다. 귀국해서 나한테 바로 메시지를 냈다는데 내가 안 봐서 전화를 한 거였다. 끊고 나서 메시지함을 보니 이틀 전에 온 자가, 보낸 녀를 닮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미처 못 봤던 거다.


그녀와 나는 스물두 살 차이가 난다. 그녀 또래 친구가 올초에 시드니로 이사 가는 바람에 영어로 대화하는 벗 중, 내가 누자의 절친으로 등극했다며 지난번 그녀가 내게 고백?을 했었다.

자기 남편도 그랬단다. 멀리 떠난 이란 친구 말고 한국인 친구 홍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며, 이사로 친구와 이별을 한 그녀를 위로해 주더란다. 그날 난 진심이던 그녀의 맘을 접수했다.





저녁 무렵이면 옆집 칼리네 베란다에 이웃사람들이 모인다.


더운 낮이 지나고 노을 지는 저녁시간이 오면 리네 란다가 해변처럼 서늘해진다. 지붕 없는 그곳에 그늘이 들고 얼음물 흩뿌리듯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사람 좋아하는 칼리와 릭은 아예 그 명당자리에다 8인용 원탁 테이블을 설치해 놓았다. 대부분 모이는 사람은 여사네와 믹네, 그리고 록햄톤 그들의 딸네부부다. 각자 들고 온 시원한 자기 음료를 앞에 놓고 끝없는 대화를 즐긴다. 나는 가끔 가다 나오는 딸꾹질처럼, 때때로 얼굴을 내미는 편이다. 그때마다 다들 환영과 환송을 해준다. 은 덜 통해도 맘이 잘 통해서다.


칼리네 바로 앞집이다 보니 난 그래도 칼리부부와는 꽤 자주 왕래가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릭과 칼리는 나를 챙기며 내가 한마디 하면 장대소를 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로빈과 믹네와도 특별한 관계로 발전했다. 말은 완벽하지 않아도 맘은 서로 잘 통한다. 말 잘 통하는 그들의 바로 옆집과는 왕래가 뜸해도, 우리 사이의 안부는 서로 챙기니까.


어제는 칼리와 릭의 딸, 킴네 부부도 함께 했다. 작년 9월부터 칼리할머니가 암투병으로 브리즈번 병원에 계셔서, 킴은 병원으로 오가다 보니 자신의 친정인 여기는 오랜만에 방문하였다. 딸네가 오는 이런 날은, 칼리할머니네 붉은 노을 아래의 베란다 웃음꽃이 팝콘처럼 튀어 우리 집까지 날아온다. 그 팝콘소리가 왠지 기분 좋다.




오늘은 칼리와 킴이 우리 집에 들러서 이야기꽃을 피우다 갔다. 얌전하고 착한 킴은 나보다 두 살 위다. 무남독녀로 자란 그녀는 잘 웃는다. 무엇보다 나의 어중 뜬 영어도 잘 알아듣는다. 그러니 난 그녀를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는다. 내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서 칼리와 셋이서 서로 깔깔깔 웃는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는 게 얼굴에 쓰여있기 때문이다. 오늘 대화 중에 칼리는 나보고 또 다른 딸, 이라 했다. 오 마이 갓!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는가. 서로 국적이 다른 우린 말은 잘 통하지 않는 관계다. 그러나 맘이 잘 통하는 사이다. 그것은 스리랑카 여인, 누자와도 동일한 계보에 있다. 아시다시피 누자는 나보고 절친이라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절친"과 "또 다른 딸"이 되는 관계의 계보는 이 잘 안 통해도 되는 거였다. 서로의 진실한 마음이 마음에 가닿아, 그 시간들이 쌓여서 되는 거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 통하는 건,
말 말고 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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