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을
못 견디는 건,
살빛과 무관하다.
불구경 온 관광객들이 우우우 비명을 지르듯 불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하고, 불은 성난 사자처럼 사나운 갈기를 뒤흔들며 활활활 타올랐다. 굉음도 우리를 덮칠 것 같았다. 무섬의 극점은 짜릿했다. 동행한 지인은 이게 지옥의 실체라며, 천국 가려면 행실을 잘해야겠다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순진한 그녀가 재밌어서 쿡쿡 웃었다.
낫으로 수수를 손수 베던 수년 전까지만 해도, 쥐, 뱀, 벌레를 살멸하거나 작업의 능률을 감안하여 추수 전에 불을 질러야 했다. 그러다 예취기가 들어오면서 연례적으로 불을 놓지는 않는다.
병해충을 태우거나, 태운 재로 밑거름을 하는 사탕수수 농장에서만 가끔 이 광경을 볼 수 있다. 사라지는 건 서성이는 기질이 있어 테크놀로지에 밀린 손일은 이제 투어코스가 되어있다.
먹이를 거머쥔 사자처럼 불은 유순히 사그라졌다.
재가 된 줄 알았던 수수 대궁이 그대로 서 있었다. 이 기막힌 반전에 나는 눈을 의심했다.
당밀을 새끼인 듯 품어 만삭이 된 대궁은, 푸른 잎들에 에워싸여 자리를 보전하며 도열해 있었다. 마른 겉잎만 그리도 타닥대며 불 갈기를 이글거렸나 보다. 소중한 걸 꽉 잡은 생명체의 생명성이 섬뜩했다. 푸른 잎들도 뜨거운 건 마찬가지였으리라.
불티는 허공을 둥둥 떠서 십리 밖까지 갈 것이다. 고요히 떨어지는 흰 눈처럼, 까맣게 태운 재는 길이랑 지붕이랑 마당… 을 가벼이 수놓으리라. 아침이면 사람들이 빗자루를 들고 그 수묵화를 지우기 시작하고, 오지랖 넓은 누군가는 이웃 골목길까지 말끔히 치울 것이다. 먼 평원의 사탕수수밭으로부터 너울너울 날아온 까만 눈을. 어느 농부의 노동이 응축된, 이 동네 주민의 옛 기억을 길어 올리는 블랙 스노.
우리 집 마당에 까만 눈이 온 새벽은 반가운 손님이 온 것 같다. 먼지보다 조금 큰 티끌. 이 보잘것없이 생긴 까만 불티 속엔 내 고향 내음이 농축되어있어서다.
밤새 마른풀 타는 냄새의 기체가 되어 바람에 섞여 찾아온, 흰 눈 같이 여리고 참새의 깃털처럼 가벼운 까만 눈. 쓸어 담으려 하면 빗자루 끝을 검게 물들이고 눈 녹듯이 녹아버린다.
나는 숨바꼭질하듯 불티를 잡으려는데, 그것은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에 숨듯 빗자루 끝에 달라붙는다. 나는 그저, 아득한 허공에다 코를 넣어 흠흠 고향을 찾는다.
훗날 나의 최후도 이 티끌만 한 존재로나마 떠올려질까.
생의 피날레로 불티가 날아간 수수 농장엔 거구의 예취기가 크르릉 대기 시작한다. 기계는 수수밭의 지우개처럼 아이들 키만 한 바퀴를 굴리어 수숫대 궁을 쓱쓱 지워나간다. 당밀이 저장된 대궁은 일정한 길이로 잘려 알곡처럼 따로 담기고, 잎은 땅으로 가지런히 깔린다.
다른 한편에선 수확한 대궁을 ‘번다버그 슈거 팩토리’로 바쁘게 운반을 한다. 대궁이 메마르기 전에 작업을 해야 당밀이 우량하기 때문이다.
사탕수수 전용 철로에서 수십 량의 수숫대를 그득 실은 기차가 뚜뚜 종일 기적을 울리고, 볕에 얼굴이 그을린 기관사가 때때로 손을 흔든다. 정겨운 겨울 풍경, 신선하다.
하얀 증기를 구름같이 피어 올리는 설탕공장 굴뚝의 정경은 이곳의 랜드마크이다. 130년 전에 지었다는 허름한 공장엔 200여 명의 직원들이 24시간 풀가동하는데, 가까이 가보면 내 유년의 조청 달일 때 맡던 달큼한 당밀의 향이 폐부 깊숙이 든다.
수수가 떠난
수수밭은,
쓸쓸해질 틈이 없다.
땅 밑에서 뿌리가 금세 싹을 밀어 올리기 때문이다. 수수는 동일한 뿌리에서 서너 번 재생되는 작물일 터, 수수밭을 장악하는 건 수수의 뿌리다. 땅의 기밀을 면밀히 탐지하고 조정하는 토대이니, 농부도 수수의 밥을 줄 때 뿌리를 향해 뿌린다.
그래 뿌리는 아무도 모르는 밭의 역사를 제 주근 main root에다 미주알고주알 꿰며 자란다.
예컨대 예취기가 용트림하며 수숫대를 베던 날의 감성, 불 질러놓고 뜨겁다며 달아나던 자가당착의 인간들, 수수밭 상공을 스캔하듯 지나던 초대형 물뿌리개, 깜깜한 밤의 고달픈 적막감….
뿌리는 밭의 디테일을 세세히 머금고 있으나, 그 어떤 것과도 무연한 체 한다. 단지 앎과 삶과 밥을 조합하여, 수숫대를 곧추 키우고, 또 다른 불티를
어느 마당으로 훌훌 띄울 에너지를 재충전한다.
* 2017. 《현대수필》 겨울호. 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