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그래이 티를 한 잔 내린다.
책을 읽으려고 베란다로 나온다.
빗방울 사이로 침묵하는 사물을 만난다.
덕분에 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책 대신 마당의 행간을 읽는다.
빨랫줄에 물방울이 동글동글 맺혔다.
방울이 표면장력을 키우려고 움찔거린다.
작은 물방울에서 생명이 감지된다. 해가 뜨면
세상에서 가장 맑은 빛을 발현할 테고
내가 한눈팔 때 물방울은 사라질 테다. 빨래처럼 물방울들을 걷어들인 적이 없다. 물방울들한테 안녕이라 말해 본 적도 없다. 그들이 떠나는 뒤태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수돗가 물뿌리개들이 휴식에 들었다.
요즘은 비 오는 날이 잦다. 물뿌리개 둘은 롱 홀리데이에 들었다. 파란색과 빨강 두 물뿌리개들은 제 몸에 부착된 샤워기가 낡아 부서져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빨간색 물뿌리개가 초록색 샤워기를 제 몸의 한 지체로 빌어올 수 있었다. 빨강이 물을 다 뿌리면 파랑이 초록색 작은 지체를 다정한 손처럼 끼우고 잔잔히 물을 뿌린다. 꽃들이 목마를 때 요긴하게 물을 준다. 오늘은 두 물뿌리개가 나란히 쉬는 중.
쉿!
비의 리듬을 깨지 않으려는
새떼가 고요히
먼 하늘을 건너간다.
탁자 위 사물들은 침묵이
순명인 듯 주인을 기다린다.
책 속의 한글과 찻잔 속 찻물이
그런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열쇠 또한 고요 침묵 중.
빗소리 바람소리 서로 다정하다.
침묵 하나,
침묵 둘,
침묵 셋,
침묵 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