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첫 외출에 우윳물을 빠트렸네
한국이 40도를 오르내릴 때, 시드니의 바깥은 추웠다. 할 수만 있다면 '낮은 기온'을 고국의 어느 무더운 골방에 소포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여하튼 날씨가 쌀쌀한 이곳에서 나는 아기와 집 안에만 머물러 있다가, 햇살이 비치는 오후가 되면 아기 옷을 두텁게 입혀 워머로 꽁꽁 싸서 베란다에 나가 있곤 했다. 4층 유닛에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내겐 불편했다. 그래도 가끔은 바깥풍경을 보여주며 바람을 쐬어주고 싶었다.
파란 하늘, 짹짹 대는 새소리, 사르르 흔들리는 댓잎을 소개시켜 주는 일이, 할미로서 아기에게 베풀 최선의 배려였다.
그러다 어젠 날씨가 많이 풀렸다.
젖병, 기저귀, 분유, 클리너, 수도 크림을 챙겼다. 재영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가까운 쇼핑센터로 나갔다. 날씨도 추웠지만 가는 길이 힐 hill 이 많아 움츠려지기도 하던 곳이다. 오늘은 재영에미 없이 처음 해보는 외출이니,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렘과 두려움이 섞이는 게, 기분이 조금 의아했다. 아니 심쿵 했다. 소위 천지만물에 통달하게 된다는, 이순을 바라보는 내게도 이 야릇한 감정이 여태 남아 있었다니.
생각보다 아기용품 챙긴 가방이 가벼우니 덩달아 마음도 가뿐해진다. 가벼운 가방 하나에 안도가 되는 걸 보면, '위안'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오는 게 맞나보다.
호주의 대표적인 쇼핑센터, 웨스트필드가 오늘의 목적지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그 앞 광장의 특별한 분수대를 재영이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클락clock을 크리에이티브하게 설치한 그 분수대의 분위기에, 재영이 몸의 시간이 머물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제 7개월인 재영인 의연히 앉아 있었다. 아기 로맨티시스트가 되었다. ㅎ 분수대 구조물과, 그 사이를 흐르는 물소리와 음악의 분위기를 깊숙이~ 마음으로 들여놓는 감상자의 모습이었다.
재영이를 지켜보는 할미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햇살이 따스하게 주위를 감쌌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He is so cute."하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시간이 꽤 지나서, 재영이 우유를 챙길 때가 되어 쇼핑센터 안의 페어런츠 룸 parents room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앗뿔싸!
우윳물을 안 넣고,
빈 우유병만 챙겨 왔다니!
그래도 분유는 갖고 왔으니, 어느 친절한 카페를 찾아가서 끓인 물을 얻기로 했다. 붐비지 않는, 마음씨 좋은 카페가 주변에 어디 있을까.
유모차를 끌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까 그, 물이 시간 사이로 흐르는 분수대를 지나 혼스비 스테이션 근처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카페로 자연스레 발길이 끌려갔다. (영어로 구차하게 부탁하기보다 내 나라 랭귀지가 훨씬 수월하니까?)
시드니에선 많은 분점이 있고 이름이 꽤 알려진 이 카페, 올리버 브라운, 한국인이 점주인 이곳이 평소엔 붐비는 곳인데 오늘은 한산하다.
스물한, 두 살 되어 보이는 바리스터 청년에게 다가가 한국말로 사정을 조용히 이야기했더니, 아주 친절하고 발 빠른 동작으로 물을 받아서 갖다 주었다.
끓는 물을 젖병에 바로 받아서 100도의 물은 이미 뜨거웠고, 내 마음은 점점 뜨거워져 갔다.
라테와 바나나 브레드를 주문해놓고 옆모습과 날렵한 동선이 내 아들을 꼭 닮은 그 아이를, 한참 동안 흘깃흘깃 바라보며 젖병의 물이 식기를 기다려야 했다. 재영이도 분위기를 아는 듯 잠잠히 할미와 함께 기다려 주었다. 할미가 까꿍까꿍 어르면 까르르륵 웃었다.
근 한 시간 반 동안 그곳 카페에 머물러 있었다. 재영이는 적당히 푹신한 긴 소파 위를 조심스레 기어 다니면서 제 장난감을 갖고 놀거나,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서서 벽에 그려진 무늬를 두리번두리번 살피며 잘 놀았다.
그러다 물이 41도 정도의 온도로 식어서 우유를 타서 먹였다.
우유를 먹는 도중에, 재영인 더운지 얼굴이 갑자기 발개져서 나는 한쪽 손으로 바지와 양말을 황급히 벗기고 윗도리를 배 위로 걷어 올려줬다. 이처럼 아기들은 온도 변화에 더 예민하니, 어른의 세심한 보살핌은 필수조건이다.
카페를 나오면서 친절을 베풀어 준 그 청년에게 고마웠다고 인사를 했더니 목례와 웃음기로 화답을 한다.
우윳물을 빠트리고 오니 이렇게 또 색다른 일이 기다리다가 시계에 밥 주듯 남은 시간을 채워주는, 실수하며 산다는 건 신비로운 곳으로의 여행이다.
돌아오는 길에 콜스에 들러서
재영이가 요즘 사각사각 갉아먹기 시작한 빨간 이브 사과 세 개를 사고,
또 달달달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내려왔다.
재영아,
너랑 할미랑
카페 데이트까지
아주 달달하게 체험했다.
외할미 계 탄 날이다. 오늘.
집에 와서 재영인
두부와 닭고기가 든
이유식을
맛있게 냠냠냠 다 먹었다.
고마워, 재영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