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오렌지 주스와 오리엔탈 티, 그 사이에서
재영에미가 재영이와 노는 사이 집을 빠져나와 북 카페에 왔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글을 읽거나 쓰거나 책 구경을 하거나, 글의 세계 속에 푹 빠지고 싶을 때 즐겨 찾는 데다.
오늘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4.80이라 해서 $5.90을 냈더니 $1.10을 내준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서빙 아가씨가 찻잔을 받혀 들고 나오는 게,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감이 확 온다.
"나 오렌지 주스 주문했는데?"
"아, 미안."
깜장 옷을 한 벌 입은 아가씨는 찻잔을 거두어서 부엌으로 되돌려놓고, 급히 오렌지 주스가 있는 북 케이스 건너편의 창고로 간다.
"익스큐즈 미, 나 그냥 그 차 마실래."
"그래? 괜찮겠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렌지 주스나 오리엔탈 티나,
내겐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나는 비워지는 컵 속에다,
내 시간의 향기를 채우러 왔으니까.
아가씨가 다른 테이블에 서빙을 오가면서
생긋생긋 웃으며 아는 체를 하기 시작한다.
미안한가, 고마운가. 친해지고 싶은가. ㅎ
사실은 나도 모르게 나도 설핏, 웃음이 나왔다.
"오" 자로 시작되는 다른 감촉의 두 음료, 그 첫 음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아가씨의 저 미소와 나의 웃음기엔 분명 공통분모가 있다.
오렌지 주스 & 오리엔탈 티.
혀를 굴리며 소리를 내는 잉글리시 악센트는, 적당히 끊어 말하는 코리언 랭귀지를 가끔 이렇게 오독한다. 그래 오늘은 아무 관련 없던 이 "오" 자의 두성을 지닌 둘 사이가 친밀해졌다.
처음 마셔보는 "오리엔탈 티"라고 하는 이 뜨거운 차를 내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떠올리고 혼자 웃는, 내밀한 이 웃음기는 뭔가. ㅎ
어쩜 사람과의 관계도 이런 인연으로 맺어질 게다.
같은 김씨거나 같은 이씨라고. 같은 '정숙'이라고, 친근감이 생겨서 맺어진 인연도 있을 게다.
재영이넨 딸과 사위와 재영이 세 식구가 산다.
딸이 일주일에 사흘 파트타임으로 직장을 나가고부터, 오늘로 236일 차 아기인 우리 재영이, 외할미가 같이 놀아보려고 입주 돌봄이로? 와 있다. 외할미 임기는 올 12. 15일까지다. ㅎ
그때까지의 시간은 내게 마치 고무줄과도 같다. 가끔은 늘어지고, 때로는 당겨진다.
아주 가끔씩은 내 마음 안에서 굴뚝 없는 잉걸불이 담기기도 한다. 그럴 땐 말없이 집을 나와 길을 걸으며 찬 공기를 마시거나,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지인하고 톡을 나누며 푼다.
여튼, 그 후부턴 재영이 돌잔치 차 서울에 갔다가 서울에서 친할머니가 함께 오신단다. 그러다 보면 이 나라에서 "킨더 가든"이라 불리는 어린이 집으로 우리 재영인 다닐 계획이다. 귀엽고 믿음직한? 우리 아기. ^^
아침 7시 45분경에 집을 나가면 오후 7시 즈음에 어김없이 귀가하는 맏딸은, 이 친정 어미에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한 친구 같기도 하고, 때론 어른스럽기도 하다. 엄마한테 늘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산다.
씩씩하게 화목하게 두런두런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재영이 엄마가 된 딸에게, 내가 고마울 때가 더 많은데. (그래 고맙단 말은 늘 새롭고 신선해서 좋다.) ㅎ
딸도 그렇지만, 사위도 친절하고 가정에 충실하다. 무엇보다 서로서로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곱다. 내겐 똑같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때론 여느 가족의 관계에서 겪는 일처럼, 상대방의 한 마디 말과 행위에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 오가다가 시름시름 내면에 담아 아삭아삭 오이지처럼 삭힐 때도 있다. 발효가 잘 되도록, 푸른 곰팡이 피지 않도록, 좋은 향이 남도록 조심하고 인내하고 노력해야 할 때도 있다. ^^
좀 더 솔직하고 엄밀히 말해도 될까.
사위나, 딸이나 같은 존재이면서도 내밀하게는 다르다는. 오렌지주스와 오리엔탈 티처럼.
사위는 아무래도 장모가 와 있으니 속으론 불편을 감수할 테니까. 이 장모라는 사람 또한 그러니까. ^^
이 조금은 낯선 시간 사이에서 난 하나의 존재로 있다. 내 시간의 찻잔을 채우고 비우며 삶을 세워 나간다.
때론 말린 잎들이 우려낸 찐하고 쌉쌀하고 따끈한 오리엔탈 티 맛으로, 때론 달달하고 시원한 오렌지 주스 같은 날들로, 재영이와 함께 내 시간의 몫을 핫하거나 쿨하거나, 때론 밍밍하게 채운다.
다른 모든 날들이 내겐 균일하게 다 귀하다.
우리 모두에게 공통분모로 주어지는 찻잔의 따끈한 향과 24시, 투에니 포 아우어스라는 우리의 시간. 그 시간의 주체는 나다. 이 시간이 비워지면 다른 시간의 주전자가 또 물을 채워놓고 나를 기다린다.
그 시간과 찻잔 사이에서 내 지난 시간들이 우려낸
찻물의 향을 상상해본다.
'오리엔탈 티 향이었까. 오렌지 맛이었을까.' 하고.
포트엔 식지 않은 향이 절반 정도 남아있다.
지난 시간의 향이 마뜩잖았다면, 남은 시간의 향에 맘을 기울이면 된다.
재영아,
우리 아기,
빠꼼히 열린 커튼 사이로
뭐가 보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