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이 지평선을 멀게 그리는 번다버그는,
사철 따스하다.
이 땅에선 오색의 선명한 가을 정취를 맛볼 수 없다. 노을빛 감나무가 사그락 대며 잎을 떨어뜨리고, 붉은빛이 임계에 닿은 사과 향은 추수하기 딱 좋은 때를 기다리는 풍광, 색 고운 고추와 대추가 마당에서 제 몸피를 줄여가는 프리티 한 한국의 가을을 번다버그 사람들은 상상치 못한다.
이곳 가을은 그저 사탕 수숫대 속에서 미미하게 움튼 그 사탕의 맛이 최고조의 농도로 익어가고, 기다란 수수 잎은 낙엽색으로 푸석푸석 마른다. 불포화 지방산 함량이 높다는 마카다미아 나무는 호두같이 영근 열매를 땅으로 내려 앉히고 농부는 그 견갑의 외피를 벗겨 고소한 알맹이를 꺼낸다.
열매를 떠나보낸 이 땅의 나무는 여전히 녹의綠衣를 벗지 않은 채 건강미를 자랑하듯 천연덕스레 서 있다. 그건 내가 이곳에서 맞은 첫가을에 그랬듯이, 찬란한 가을 색을 공식처럼 몸에 익힌 내 나라 사람들에겐 생소한 풍경이다.
외양간이 따로 없는 방목장에선 평원의 풀을 뜯다가 자기들끼리 스스로 물을 마실 호수와 쉴 만한 그늘을 찾아 몰려다니는 소떼들이 사시사철 눈에 띄기도 한다.
불혹을 넘기도록 사계절이 뚜렷한 고국의 정겨운 풍경을 새겨둔 내 몸은 한동안 내 나라의 봄여름 가을 겨울을 그리다 몸살을 앓기도 했다.
그러다 요즈음엔, 가을이 되어도 푸른 고집 꺾지 않는 이국땅의 자연을 보며 내면의 열매를 상상한다. 자연 앞에서 감성을 투사하다 보면 싸늘히 가라앉은 모래알 같은 마음이 별이 되어 하늘에 뜨기도 한다. 어느 땅에 어떤 계절로 살든 자연이나 사람이나 속에서 키우는 열매가 있을 게다.
그날은 노을 진 버넷 해드 비치에서,
세 그루의 나무가 시선을 끌어당겼다.
세 부류의 나무, 그들 모두에게서 사과처럼 붉게 익은 유형有形의 열매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과보다 더 붉고 호두보다 더 단단한 내면의 열매가 나무의 심지心地로 굳게 자라고 있었다.
가파르든 굽지든 물속이든 뭍이든, 그 각각의 몸속 어딘가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자아가 열매처럼 맺혀서 자라는 게 느껴졌다.
하나뿐인 줄기가 가늘게 흔들거리거나, 허리가 땅바닥에 닿도록 꾸부러져도, 제 길을 기어이 오르다 메마르게 될 생명체. 공간을 오르는 자연은 평등하고 자유하다. 공평한 생명의 테두리에서 자신의 집을 의연히 지키며 서 있는 풍광이, 그래서 아름답다.
이들에게서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없다 할 순 없다. 내면 깊숙이 숨기고 있을 이들의 열매가 가을처럼 깊게 익어가고 있다. 그래 태양이 강렬하기로 소문난 이 땅의, 불기운으로 이글거리던 여름을 견고히 지낸 이 나무들만의 추색秋色 앞에서, 나는 엄숙해졌다.
해풍은 낭만의 감성까지 실어와 이름도 모를 생명 있는 것들의 몸을 스치며 생명체의 속내를 짭짤하게 익히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등이 꺾이듯 굽은 이 한 그루의 나무, 그는 폭풍우가 나무의 가지를 헤집거나 바닷물이 아무리 높이 차올라도 거뜬히 이겨낼 자아를 꿋꿋이 익히다가 굽어지고 말라 간 듯했다. 해가 떨어지고 나니 반쪽의 흰 달이 벗인 양 하늘을 질러오고 있었다.
무참하던 것들 속에서 무궁한 희망이 잠재되고 있는 현실은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엄중하다.
무참함을 극복하려는 의지, 즉 살아낼 의지가 있으면 희망은 파생된 열매처럼 자라서 영근다.
가을 대추가 대추로 발갛게 익듯이,
모든 생명체는 자기다운 자아를
가을처럼 익힌다.
미미하던 기억조차도
나무의 결처럼 단단하게 익혀
탄탄한 자아를 온몸으로 표출한다.
때로 기억을 잊기 위하여, 기억을 기억하기 위하여, 칙칙하던 기억을 정화하기 위하여 우린, 기억의 바다에 발을 담근다. 살아온 삶이 수월치만은 않았던 모든 생명체는 그래서 평등하다.
물속에 잠겨있는 나무든, 가는 허리가 잔바람에도 휘청거리든, 곤궁한 허리가 꺾어지든 수없이 흔들리면서 매운 고추처럼 자아가 익어간다. 굽 지거나 가녀리다고 무조건 가난하기만 한 생은 아닐 터, 그들만의 푸르렀던 기억이 소환되는 날들로 힘을 얻을 게다. 가을사과처럼 상큼한 향으로 익힐 것이다.
그러다 모든 것들의 생명이
낡은 종잇장처럼 포삭포삭 내려앉아
언젠간 한 줌 재가 될 터,
단 한 번의 생을 맘껏 익히리라.
가을아, 너의 가을로 익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