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난감한 상상

- 이 아기 백인? 너의 둘째 아들?

by 예나네
외국에 살다 보면 생경하고 기발하여 생뚱맞기까지 한 질문을 받는다.


그날도 나는 재영이와 쇼핑센터에 갔다.

엥그리칸처치 멤버인 말레이시안 셸리 노부부를 우연히 만났다. 이들은 유모차에 탄 재영이한테로 관심이 쏠린다.


헬로, 헬로.

유 아 쏘 스위트!
굳 보이.


하며 인상 좋은 이 노부부, 우리 외손주를 잘도 어른다. 그러다 셸리가 정색을 하고 내게 한 질문.


Is this baby white?


재영이 얼굴이 뽀얗고 머리가 노르스름해서인지, 재영이가 백인인지 묻는다.
순수 백인인 호주 사람이었다면 자기들 족속이 아니라, 유구한 뿌리를 물려받은 한국인인지 담박 깨달았을 터인데.


그래도 그때 나는,
재영이가 블랙 Black 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0.5초 정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둘째 딸이 이걸 알면 엄마, 그거 인종차별이야, 하고 따끔 침을 놓겠지만, 그래도 그날 내 마음은 그랬더랬다.




자국인의 관점으론 머리카락 색깔만으로도 뿌리 깊은 한국인임을 분명히 분별 가능하다.




쇼핑센터 3층의 '플레이 그라운드'에 가면 재영인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살랑살랑 손발이 바빠진다. 그날따라 복작복작 시끌시끌 아기들이 엄마 아빠 할비 할미들의 보호 아래 재잘재잘 콩닥콩닥 잘 놀고 있었다.


할미의 팔에서 내린 재영이, 머리에 연보랏빛 히잡을 곱게 쓴 스리랑카 여인을 힐끗 보다가, 그녀 앞에 놓인 푸르뎅뎅한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 발견한다. 헤죽헤죽 반갑기가 그지 없다는 듯 양팔을 번쩍 들어가며 웃더니, 달리기 하듯 목표지점을 향해 옹굼옹굼 기어간다. 좋은 놀잇감을 다 제치고 그 물건에 재영이가 옴팡 빠져들 줄은, 이 할미 5초 전까지도 예상치 못했다.

남의 집 샴푸랑 샤워 젤을 담을 새 것을, 제 것인 양 잘도 갖고 논다. 툭툭 치고 당기고 밀치고 엎어보고 제쳐보고 깨물어도 보고... 제 맘껏 다 한다. 평소에도 재영인 바구니, 그중에서도 플라스틱 가벼운 바구니가 자기 장난감인 줄 안다.




눈이 굵고 눈썹이 길고 얼굴이 동그스름한 이 여인, 가무잡잡한 블랙black에 속하나 누가 봐도 교양미가 배어나는 매력적인 모습이다.

잠시나마 머금었던 '블랙'에 대한 내 얕고 설익은 밥이 봄눈 사라지듯 녹아지고, 세상을 바꾼 별들이 하나 둘 교차된다. 마하트마 간디, 오프라 윈프리, 마틴 루터 킹 목사, 만델라 대통령.


누가 본 듯, 내 얼굴이 붉어졌다.


가무잡잡 프리티 한 이 소녀가 이 여인의 딸이다


여인은 네댓 살 먹은 이 예쁜 딸아이를 플레이 그라운드에 놀게 하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조금 무료했을까.

재영이가 귀여웠을까.

여인의 마음이 유순했을까.


유 아 쏘 큣!

컴 온 컴 온!


하며 재영이 앞에서 수줍은 듯 손뼉을 가볍게 치는 맵시가 프리티 하다. 반면 재영인, 머리에 히잡 쓴 이방의 여인이 자기 보고 어르는 경험, 난생 처음 겪는다.


바구니를 이리저리 밀었다 당겼다 하던 천진난만 한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여인과 바구니를 번갈아 쳐다본다. 바구니 한 번 여인 한 번, 바구니 한 번 여인 한 번... 재영이 시선이 갑자기 소나기 내리듯 바빠졌다.
아무래도 이 할미가 나서야 할 타이밍이다.


"네가 뷰티풀하고 프리티해서 얘가 자꾸만 쳐다보나 봐."


그랬더니 실비처럼 고요히 재영이를 어르던 그 여인, 불현듯 박장대소를 하며 웃는다.
웃음에 소통의 달인 재영이, 이 들뜬 분위기에 모른 체하며 잠자코,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꺄르르륵 꺄르르륵, 플레이 그라운드가 쨍쨍 울리도록 웃어젖힌다. 꺄꺄꺄꺄 꺌깔깔!!

'아유, 우리 재영아 목소리 좀 낮춰 주라.'


그 와중에 내게 스콜처럼 건넨, 그녀의 질문 하나,


이 아기 너의 둘째 아들이니?
아유,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냥 좋아서.


사실, 다민족이 모여 사는 호주라는 나라.
이곳에서 타국인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날 나는 새로 이웃이 된 터키 여인이 자기 아들 얘기를 해서 22살쯤 된다고 예상했었는데, 알고 보니 2살짜리 아기가 있는 젊은 여인이었다.



나는 속으로 대략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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