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가까이에서 살던 사람.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꾼으로 사셨다.
땅을 일구는 일이 곧 삶이었고, 계절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몸으로 아시던 분이었다. 하늘의 색과 바람의 결을 보고 하루의 일을 가늠하던 사람. 그분의 시간은 늘 땅 가까이에 있었다.
말로 남기지 않은 청년의 시간
청년 시절에는 일본에서 사셨다고 들었다. 그 시절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집안을 지키며, 육이오라는 험한 세월도 고스란히 건너셨다. 말로 남긴 기록은 적었지만, 그분의 삶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증언이었다.
자상했던 손의 기억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는 아직도 선명하다.
마당을 천천히 오가던 뒷모습,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 무렵 잠시 숨을 고르던 얼굴. 술은 많이 드셨지만 손자들 앞에서는 늘 자상하셨다.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감촉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열네 살의 이별, 그리고 시간
열네 살에 이별했다. 그때는 이별이 이렇게 오래 남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함께 흐려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무게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분의 얼굴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오십을 넘어서 더 또렷해진 그리움
어느새 나는 오십을 넘겼다.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날이면, 말없이 곁에 앉아 주던 할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진다. 굳이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그 자리에 계셔 주기만 하면 충분했으니까.
꿈에라도 뵙고 싶은 사람
오늘은 그 시간을 다시 불러본다.
기억 속이 아니라, 꿈에라도 한 번만 더 뵙고 싶다.
아무 말 없이 웃으며 바라봐 주시던, 그 모습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