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사공 홍이평의 아들들, 홍덕준·홍덕연·홍덕윤·홍덕렴의 선택
조선 중기는 늘 ‘위기의 시대’로 기억된다.
사림의 급부상과 훈구의 잔존, 사화의 연쇄, 불안정한 왕권,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그림자까지. 시대는 늘 날카로웠고, 사람들은 쉽게 소모되었다. 그러나 이 격동의 중심에서 끝내 무너지지 않은 가문들이 있었다. 그들은 칼을 들지 않았고, 당파의 선두에 서지도 않았다. 대신 조용히 학문을 쌓고, 관직을 수행하며, 시대를 건너갔다.
예사공 홍이평의 아들들, 덕분·덕연·덕윤·덕렴의 삶은 바로 그 ‘조용한 지속’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곧 가문 전체의 서사로 확장된다. 네 형제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으나, 공통된 질문 하나를 품고 있었다.
“유학자는 국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벼슬보다 먼저 세워진 것
홍이평의 집안에서 학문은 출세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질서였다.
덕준이 생원시에 나아가고, 덕연이 별시에 급제하며, 덕윤과 덕렴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이 집안에는 하나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말은 절제되었고, 기록은 엄격했으며, 행동에는 늘 이런 질문이 따랐다.
“이 선택은 후대에 남겨도 되는가.”
홍덕준은 화려한 관직 경력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문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었다. 학문을 일상의 규범으로 만들고, 집안을 하나의 서재처럼 운영했다. 글을 읽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침묵해야 할 순간을 가르쳤다. 이 조용한 축적이 없었다면, 이후의 모든 이야기도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2. 홍덕연, 원칙을 시험대에 올리다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이는 덕연이었다. 그는 언관의 길을 걸으며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직언은 곧 위험이었고, 원칙은 언제나 불리했다. 그는 여러 차례 물러났고, 다시 불려 나왔으며, 그 사이에서 타협보다는 침묵을, 침묵보다는 독서를 선택했다.
그의 묘지문은 화려하지 않다. 공적의 나열보다 태도의 기록에 가깝다. 그는 벼슬을 ‘성취’가 아니라 ‘책임’으로 여겼고, 물러남을 실패가 아니라 자기 절제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덕연의 만년은 단순한 은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문이 다시 학문으로 회귀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홍덕연 묘(여주시 소재)
3. 홍덕윤, 국가의 근본을 맡다
덕윤의 길은 달랐다. 그는 종묘와 경연, 그리고 이조 판서로 이어지는 중책을 맡았다. 왕조의 의례와 인재 선발, 국정의 기초를 담당하는 자리였다. 격동기일수록 이러한 자리는 더욱 무거웠다.
그러나 그의 기록에는 과시가 없다. 그는 제도를 흔들기보다 지키는 사람이었고, 변화를 외치기보다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는 소극성이 아니라 분명한 철학이었다.
나라가 흔들릴수록, 유학자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믿음.
덕윤은 말보다 제도로, 주장보다 운영으로 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4. 홍덕렴, 행정 속에 스민 학문
덕렴은 실무 관료였다. 상의원 직장이라는 직책은 겉으로 보기에 사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왕실 재정과 물자의 흐름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학문을 관념에 두지 않았다. 기록하고, 계산하고, 정리하는 일 속에서 유학의 원칙을 구현했다.
그의 삶은 말해준다.
학문은 강론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장부와 규정 속에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고.
덕렴의 존재는 예사공파가 ‘말하는 가문’이 아니라 ‘운영하는 가문’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5. 한 가문이 선택한 생존 방식
이 네 형제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가 있다.
빠르지 않음, 과하지 않음, 그리고 물러설 줄 앎.
이들은 당파의 중심에 서지 않았고, 위기를 영웅담으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학문을 일상의 규범으로 내면화하며,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조용히 제 자리를 지켰다.
조선 중기라는 국난의 시대를 이들이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유학은 이들에게 사상이 아니라 삶의 형식이었고, 가문은 혈연이 아니라 윤리 공동체였다.
이 글은 한 가문의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위기의 시대에 유학자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오래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예사공파 홍씨는, 소리 없이 학문의 명가로 완성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