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왕조를 넘어선 가문

예사공파 홍 씨의 위상과 역사적 전환

by 홍승표 승우담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기는 개인뿐 아니라 가문 전체의 존속이 시험받는 시기였다. 이 시기를 통과한 가문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적 선택의 실패로 단절되었고, 일부는 지역 사족으로 흡수되었으며, 극히 일부만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홍 씨 예사공파는 바로 이 마지막 범주에 속하는 가문이다.

앞선 2편에서 살펴본 강경공 홍빈은 고려 후기 홍 씨 가문이 이미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중요한 점은, 예사공파의 주요 선조들 또한 강경공과 동시대의 정치적·사회적 기반 위에서 활동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예사공파가 고려 말 혼란 속에서 새로 부상한 계통이 아니라, 이미 귀족 관료 사회 내부에 편입되어 있던 홍 씨 가문의 한 축이었음을 의미한다.


1. 고려 후기 중앙 귀족 사회 속의 예사공파

예사공파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직은 고려 후기 중앙 정치 구조의 핵심을 이룬다. 홍한승과 홍충이 역임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는 군사·외교·기밀을 관장하던 최고 권력 기관의 관직으로, 왕권과 직결된 중추였다. 이는 예사공파가 단순한 문벌 가문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핵심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신뢰를 확보한 귀족 가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홍세의 보국도첨의 정승과 판전리사 사는 고려 최고 행정 기구에서 국정 전반과 재정·법제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관직은 일시적 영예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정치적 신뢰와 행정 능력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지위였다. 홍분이 맡은 판도판서 또한 토지·호적·행정구역을 관장하는 핵심 관서의 수장으로, 고려 국가 질서의 근간을 담당한 관직이다.

이러한 관직 계보는 예사공파가 무반이나 지방 세력에 기반한 가문이 아니라, 추밀원–도첨의부–판도사로 이어지는 중앙 행정 구조 안에서 성장한 귀족 가문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즉 예사공파의 위상은 특정 인물의 공훈이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누적된 정치적 자산 위에서 형성되었다.


2. 왕조 교체기, 단절이 아닌 연속

고려 말 조선 초는 귀족 가문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새 왕조는 기존 귀족 세력을 경계했고, 고려에 대한 충성은 곧 정치적 부담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예사공파 홍 씨는 극단적인 저항이나 은거를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관료적 연속성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홍유도의 사례는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고려 말 동지밀직사사·감찰대부·첨서밀직부사를 역임했으며, 공민왕 대 연경(燕京) 수행 공신으로 기록될 정도로 왕조 말기까지 국가에 봉사한 인물이었다. 그의 관직 이력은 예사공파가 끝까지 고려 중앙 관료 체제의 일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가문은 고려에 대한 충성에 머물지 않았다. 왕조가 바뀌자, 예사공파는 새로운 정치 질서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재정립해 나간다. 그 전환점에 선 인물이 바로 홍명이다.


3. 홍명과 예사공파의 위상 전환

홍명은 사료에 “이전 왕조의 재신으로서 조정에 들어왔다(以前朝宰臣入)”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 출신 관료라는 사실이 조선에서 배제의 이유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조선 조정은 홍명을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임명함으로써, 그를 새 왕조의 핵심 행정 인력으로 활용했다.

한성판윤은 수도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로, 조선 초기 국가 질서를 실제로 집행하는 자리였다. 이 직책은 단순히 과거의 명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관직으로, 새 왕조가 요구한 능력과 충성, 그리고 사회적 신뢰를 모두 충족한 인물에게만 허락되었다.

홍명의 등장은 예사공파가 고려 귀족 가문에서 조선 양반 가문으로 이행하는 결정적 분기점을 상징한다. 이때부터 예사공파는 더 이상 ‘고려의 잔존 세력’이 아니라, 조선의 제도와 질서 안에서 기능하는 사대부 가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4. 가문의 기억과 조선적 질서의 수용

이 전환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예사공파가 가문의 계보와 기록을 극도로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홍澓의 개자(改字) 경위를 둘러싼 상세한 설명, 항렬자를 통한 세대 정리는 단순한 족보 기술이 아니라, 조선 사회가 요구한 명확한 혈통과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었다.

이는 예사공파가 왕조 교체를 단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가문의 기억을 재정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정체성을 구축했음을 보여준다. 고려에서 축적된 귀족적 위상은 조선에서 유교적 예절과 문중 질서로 재해석되었고, 그 결과 예사공파는 안정적으로 조선 양반 사회에 편입될 수 있었다.



예사공파 홍 씨의 역사는 한 가문이 어떻게 왕조의 흥망을 넘어 생존하고, 나아가 새로운 질서 속에서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고려에서는 국가 운영을 담당한 귀족 가문이었고, 조선에서는 제도와 예를 중시하는 양반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 연속성의 중심에는 개인의 선택보다 가문 차원의 축적된 정치 경험과 기록 의식, 그리고 시대 변화에 대한 절제된 대응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홍명을 기점으로 본격화되는 조선 시기 예사공파의 전개와, 홍 씨 가문이 조선 사회 속에서 어떻게 뿌리내리고 확장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홍명의 묘(용인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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