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역사가 외면한 소년의 겨울, 노루골의 봄이 되다

by 홍승표 승우담

​1. 시린 실록의 행간에 피어난 온기

​우리가 기억하는 단종(端宗)은 이름보다 '비극'이라는 수식어가 더 먼저 떠오르는 왕입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어좌에 올랐으나 숙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첩첩산중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어 결국 열일곱 짧은 생을 마감한 소년. 실록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은 차디찬 강물과 외로운 죽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흥행 중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그 박제된 역사에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만약 그 외로운 유배길에 그를 진심으로 아끼던 이웃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고 말이죠.

흰 도포를 입고 서늘한 눈매로 활시위를 당기던 소년은, 이 영화 속에서 비로소 '임금'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벗고 '이홍위'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2. 겸상(兼床), 군신(君臣)의 예보다 깊은 사람의 도리

​영화에서 가장 긴 여운을 남긴 장면을 꼽으라면, 단종과 엄흥도가 소박한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순간일 것입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왕과 백성이 겸상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입니다. 그러나 영월의 깊은 밤, 그들은 격식을 버리고 서로의 숟가락 끝에 담긴 정을 나눕니다.


​그 밥상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었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엄흥도의 간절한 무언의 외침이었고,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단종의 서글픈 부탁이었습니다.

거친 손으로 소년의 손을 꼭 맞잡으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던 엄흥도의 일그러진 얼굴. 그 표정은 충성심이라는 딱딱한 단어로는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자애(慈愛)였습니다.


​3. 노루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배지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노루골 백성들이라는 상상력을 더해 비극의 무대였던 유배지를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시킵니다.

한양의 권력자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노루골 사람들은 소년 임금을 위해 감자를 찌고, 함께 들길을 걸으며 소박한 농담을 나눕니다.


​그 투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노루골은 유배지라기보다 차라리 '피난처'에 가까웠습니다. 권력의 비정함으로부터 소년을 보호하고 싶었던 민초들의 마음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관객들에게 거대한 위안을 줍니다. 실제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춥고 외로웠겠지만, 영화 속에서나마 그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활짝 웃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가슴을 적십니다.


​4. 기록은 차갑지만, 기억은 뜨거워야 하기에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실제로는 저렇게 행복하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상상을 하는가?"라고 말이죠.


저는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진심, 실록의 행간에 숨겨졌을지도 모를 따뜻한 손길들을 복원해 내는 것.


그것은 500년 전 외롭게 스러져간 영혼에게 우리가 보낼 수 있는 가장 뒤늦은, 그러나 가장 진실한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빛바랜 옛 사진 속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엄흥도의 모습처럼, 진정한 충절은 죽음을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것임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왕으로 태어나 외로운 섬처럼 살다 간 소년에게, 노루골 사람들은 그가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습니다.


​5. 우리 마음속의 노루골을 찾아서

​상영관을 나오며 영월의 밤하늘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엄흥도와 노루골 사람들이 바라보았을 그 별들이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를 비추고 있겠지요.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경쟁은 치열하며, 누군가는 권력의 흐름 속에서 소외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왕과 사는 남자> 속 노루골 같은 마음이 있다면 어떨까요?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시린 손을 맞잡아줄 수 있는 용기, 갓 지은 밥 한 그릇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다정함. 그것이 있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든든한 '엄흥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지지 않는 꽃처럼 지조를 지킨 이들의 편에 서게 됩니다. 올겨울, 유난히 시린 바람이 분다면 영월 장릉 위를 비추는 그 별빛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한 소년을 품었던 노루골의 봄을 간직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