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한평생, 학문의 길을 묻다 – 치재 홍인우를 만나다
조선 중기, 뜻을 꺾지 않은 한 사람
조선 중기, 격변의 시절에도
묵묵히 한 길을 걸어간 이가 있었습니다.
벼슬보다 책을 가까이했고,
세속의 명예보다 부끄러움 없는 삶을 택한 사람.
그의 이름은 홍인우(洪仁祐).
자는 응길, 호는 치재(恥齋).
그 앞에 ‘유일(遺逸)’이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인물.
세속에 뜻을 두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은 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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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지학의 길 위에서
1515년, 중종 10년.
홍인우는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곧 과거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을 위한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방향을 틉니다.
화담 서경덕과 경의를 토론했고,
서울로 올라온 퇴계 이황과도 이론을 나눴습니다.
대과에는 수차례 낙방했지만,
그의 학문은 이미 시험을 넘어선 경지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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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한 학문
치재는 ‘예(禮)’를 목숨처럼 여겼습니다.
성균관 유생들과 격론을 벌였고,
예의 근거는 늘 경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평생 붙들었던 화두는
『중용』과 『대학』,
그리고 ‘성(誠)’과 ‘정심(正心)’.
그의 학문은 말이 아닌
행실로 증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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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러운 하루, 단단한 내면
치재의 하루는 닭 울음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세수하고 옷깃을 여민 채 책상 앞에 앉는 고요한 시간.
『심경』과 『근사록』만 곁에 두고,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예복을 갖춰 앉았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왜 그리 조심스럽게 생활하십니까?”
그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 “위로는 하늘이, 아래는 땅이 나를 지켜보고,
그윽한 곳엔 귀신이 있고, 밝은 곳엔 처자식이 있으니
어찌 함부로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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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이름으로 삼다
처음엔 호를 ‘경재(敬齋)’라 했습니다.
그러다 “이룬 것이 없으니 부끄럽다” 하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뜻으로
‘치재(恥齋)’라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이름으로 삼는 사람,
그가 바로 치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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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도 예를 다한 사람
인종이 승하했을 때,
그는 초상 기간 내내 물만 마셨고,
그 후로는 소식하며 슬픔을 견뎠습니다.
부친의 상(喪) 앞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여막에서 상을 치르다 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겨우 마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은 백 년보다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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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남은 마음, 그리고 길
그는 학자이자 실천자였습니다.
정암 조광조의 글이 사라질까 염려해 정리·편찬했고,
『관동일록』은 퇴계 이황의 발문과 함께
사림들에게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세속 속에 있으나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
그는 늘 조용히,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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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학문을 따로 두지 않다
그의 묘소는 여주 대신면 계림리에 있습니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 기천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장남 홍진은 임진왜란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당흥부원군에 올라 이조판서를 지냈고,
차남 홍적은 사헌부 집의를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후손들 역시 상을 다 치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등,
예의 전통은 슬픈 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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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치재란?
치재는 말합니다.
> “학문이란,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 말 한 줄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울림이 되는 까닭은
그가 단 한 번도 삶과 학문을 따로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