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47일간의 항전과 봄날의 고요함

by 홍승표 승우담

남한산성 – 47일간의 항전과 봄날의 고요함

따스한 봄 햇살이 남한산성 입구를 비추고 있었다. 산새 소리는 고요하고, 꽃잎은 성벽 옆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길은 1636년 겨울, 조선의 운명이 걸린 처절한 전쟁터였다. 병자호란. 인조는 청의 군대를 피해 이곳 남한산성으로 들어왔고, 47일 동안의 고립 속에 피를 말리는 항전을 벌였다.


산성을 따라 걷는다. 거친 성벽은 세월을 견디며 여전히 당당했고, 수어장대에 오르자 당시 군사들이 이곳에서 어떤 심정으로 사방을 바라보았을지 상상하게 된다. 북문 근처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장경사엔 침묵의 기도가 남아 있었다. 그들이 버틴 시간, 그 무게가 봄바람 속에도 느껴졌다.


그 치열한 47일 속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하나는 현실과 타협하며 조선을 살리고자 했던 최명길, 또 하나는 절대 굴하지 않겠다며 끝까지 싸우자고 외친 김상헌. 둘은 서로 반대의 길을 걸었지만, 모두 조선을 위한 선택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내가 만약 최명길이었다면,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굴욕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김상헌처럼 끝까지 항전하며 무너지더라도 기개를 지켰을까? 그 선택은 당시에도, 지금도 결코 가볍지 않다.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단죄보다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는 승자나 패자의 잣대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고뇌와 선택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는 살아있는 이야기로 남는다.


지금의 남한산성은 산책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가족, 연인, 친구들. 그들은 웃고 있었고, 아이들은 뛰놀았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 너머로 47일 동안 버티던 조선의 고요한 절규를 본다. 항복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버틴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건 굴욕이 아니라, 더 버티지 못했던 절망의 끝에서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말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산성을 내려오며 다시 한번 돌아본다. 전쟁의 기억이 묻혀 있는 그곳, 그러나 지금은 평화로운 봄날. 남한산성은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이야기를 간직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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