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 길을 거닐다
초여름의 문턱에서 찾은 동구릉은, 말 그대로 ‘초록의 성소’였다.
햇살에 부서지는 잎사귀들은 서로 경쟁하듯 초록을 뽐내고,
숨결처럼 퍼지는 신록의 향은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조선의 왕들이 잠든 이곳.
소나무 숲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오랜 역사와 시간을 말없이 품고 있다.
그 곁을 걷노라면,
나는 어느새 과거의 시간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동구릉을 거닐다 보면
조선왕조의 숨결이 고요히 가슴으로 스며든다.
역사의 굴곡을 지나며 꽃 피웠던 찬란한 문화와 정신,
그 치열했던 정치의 현장과
그 너머 백성을 향한 애민의 마음까지
이 푸르른 동산 안에 켜켜이 쌓여 있다.
찬연했던 왕조의 그림자들이
초록의 숲 사이로 아련히 떠오르고,
묘역을 감싸는 능선 위로 스치는 바람은
마치 과거의 시간들이 지금도 이곳을 돌고 도는 듯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삶의 무게로 굽었던 등이 어느새 펴지고,
왕조의 흔적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내 마음까지 따스하게 감싸준다.
지금 이 순간,
동산은 초록으로 충만하다.
그 초록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쉼이고, 위로이고,
잊고 지낸 시간과 정신을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조용한 울림이다.
동구릉의 초록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오랜 왕조의 숨결과 찬란한 이야기들이
조용히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