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산양리 독립운동가 백은 최재화 목사를 기억하며
낙동강이 부드럽게 굽어 흐르는 내 고향, 산양리.
언제나 강물은 고요히 흘러가고,
계절 따라 논밭은 색을 달리하며
마치 오래된 풍경화를 바꿔 걸듯
우리 마을을 감싸 안았다.
어릴 적 나는 그저
그 강물과 들판이 주는 평화 속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마루 끝에 앉아 저녁놀이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랐다.
그리고 늘 그 자리엔
마을 입구에 묵묵히 서 있는 비석이 있었다.
처음엔 그 비석이
그저 돌덩이에 불과했다.
숨바꼭질을 하다 숨을 곳을 찾지 못하면
나는 친구들 몰래 그 비석 뒤로 달려가 숨곤 했다.
까맣게 그을린 비석의 표면은
장난꾸러기 내 뺨에 닿으면
늘 시원했다.
어른들이 들려준 이야기
그러다 저녁이면
어른들이 마루 끝에 둘러앉아
담배 연기 사이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저 비석에 글 새겨진 목사님이 말이다.
우리 동네서 독립만세를 앞장서 불렀던 분 아이가.”
나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었다.
그게 얼마나 큰 일인지,
그 소중함과 두려움을
어린 마음에는 온전히 담지 못했다.
청년이 되어 다시 만난 목사님
시간이 흘러 나는 청년이 되었다.
세상 바깥의 바람을 맞으며
고향을 잠시 떠나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최재화 목사님의 전기를 읽게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 어른들의 입에서
가늘게 전해지던 이야기가
얼마나 뜨겁고 큰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목사님은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고향 산양리로 돌아와
박진오 선생과 함께
해평 3·1 만세운동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리엔
목사님의 제수,
스물한 살 어린 여인 이소열 여사도 있었다.
그 여린 손에 태극기를 쥐고
주재소 앞에서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이소열 여사.
주재소 순사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사람들은 돌을 던져 맞섰으며,
마침내 총성이 터졌다.
시위에 나선 이들은 모두 붙잡혀
선산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소열 여사는
손발이 묶인 채 땅바닥에 엎드려
몽둥이로 80대를 맞았다 한다.
그 젊고 가녀린 몸이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러나 그녀는 끝내
나라를 향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
다시 마주한 고향의 풍경
그때부터였다.
내가 다시 고향 마을에 돌아와
비석 앞에 서면
예전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은.
어릴 적 숨바꼭질하던 그 자리,
손바닥을 대면 차갑던 그 돌.
이제는 그 표면을 가만히 쓰다듬으면
내 마음속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날의 함성과 떨림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그리고 문득 눈길을 들어
강가 쪽을 바라보면
낙동강이 예전처럼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물결 너머에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 하나로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의 숨결이
아직도 조용히 스며 있는 듯했다.
지금도 고향의 바람은
오늘도 고향의 바람은
내 귀를 살포시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면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 바람 속에는
언젠가 목사님과 이소열 여사가
우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불렀던
그 함성이,
아주 희미하게 실려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린다.
“최재화 목사님, 이소열 여사님,
그날 그 함성…
지금도 이 고향 마을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낙동강 쪽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숙인다.
어쩐지 내 마음도
조용히, 그러나 깊게
그 강물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