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싶은 장면들, 지울 수 없는 마음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by 홍승표 승우담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 큰 후회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곤 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장면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우고 싶지만, 끝내 지울 수 없고, 그래서 더 아릿하게 남아 있는 순간들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내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느냐”며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끝에 세 가지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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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면 — 떠나야 했던 어린 날, 그리고 보내야 했던 마지막 순간


여덟 살 무렵, 조부모님의 따뜻한 품을 뒤로하고 처음 가보는 큰 도시 서울로 이사 오던 날.

할머니는 골목 끝까지 작아지는 내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셨고, 할아버지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마당의 흙냄새, 장독대 사이로 스며들던 햇빛, 저녁이면 들려오던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트럭이 골목을 돌아 나가던 그 순간,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멀어졌습니다.


어린 나는 그저 어른들의 결정을 따라가는 것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그날의 ‘떠남’은 어린 마음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이별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뒤, 나는 또 한 번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보내야만 했던 마지막 순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마루 끝에서 나를 바라보던 분.

어느 날부터 말이 줄고, 눈빛이 깊어지고, 손의 온도가 서서히 식어가던 그 모습은 아직도 마음 어딘가를 서늘하게 합니다.


그날따라 창밖의 바람은 유난히 잔잔했지만, 내 마음은 거센 파도처럼 요동쳤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준 사람이 떠나는 순간은, 어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그 마루 끝 자리를 떠올리면

시간의 결이 거꾸로 흐르는 듯합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또다시

“왔느냐?”

그렇게 미소 지어주실 것만 같아, 마음이 조용히 일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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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장면 —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떠난 어머니


내 나이 마흔아홉, 갑작스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난 어머니.

삶의 조언을 들려주던 목소리, 손등의 따뜻한 체온, 사소한 안부 하나에도 마음을 다해주던 그 사랑.

너무 익숙해서 오래 함께할 줄 알았던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조금만 더 다정했더라면’,

‘그날 그 말을 하지 말았더라면’.

작은 후회들이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를 잔잔히 흔듭니다.


부모를 떠나보내는 순간만큼은,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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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것들


이 두 장면은 지우고 싶지만, 동시에 내 인생을 가장 깊이 빚어낸 기억들입니다.

떠나보낸 사람들, 떠나야만 했던 순간들, 품에 오래 두고 싶은 장면들.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지울 수 없다면, 나는 이 기억들을 더 따뜻하게 안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움 속에서 마음이 조금 더 깊어지고, 그 깊어진 마음이 다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조심스럽게 그 장면들을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