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먼저 말을 거는 산.
눈 덮인 산에 오르면 말수가 줄어든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풍경 앞에서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진다. 발밑에서 사각사각 부서지는 눈 소리만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음을 알려준다. 산은 늘 그렇게, 침묵으로 사람을 맞이한다.
내려놓은 것들이 더 단단해 보일 때
나무들은 한 해 동안 붙잡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채 서 있다. 잎도 색도 없이 흰 눈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모습은 이상하게도 연약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비워냈기에 더 곧고 단단해 보인다. 산은 말없이 내려놓음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눈은 흔적을 가리지 않고 덮는다
눈은 공평하다.
험한 바위도, 거친 발자국도, 미처 지우지 못한 자국들까지 같은 흰빛으로 감싸 안는다.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눈 덮인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 역시 나를 괴롭히던 기억과 비교에서 잠시 벗어나게 된다.
경계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능선에 서면 하늘과 산의 경계가 흐려진다.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풍경 앞에서, 나와 세상 사이에 분명하다고 믿었던 선들 또한 희미해진다. 그 순간 깨닫는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많은 경계들은 사실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었음을.
아무 일도 없는 시간의 힘
눈은 차갑지만, 그 아래에는 봄을 준비하는 온기가 숨어 있다. 겉으로 보기엔 멈춰 있는 듯한 이 계절이, 가장 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산은 알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삶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하루를 접는 산, 마음을 놓는 나
해가 기울며 눈 위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산은 하루를 조용히 접는다. 나도 그 곁에서 마음을 내려놓는다. 더 가지지 않아도, 더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의 속도와 지금의 자리도 충분하다고.
눈 덮인 산은 오늘도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