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영 Aug 05. 2019

매년 같은 곳으로 떠나는 여름휴가

심리적 아지트 

"여름휴가 어디로 가요?"

"울진이요."

"아... 또요?"


무언가 색다른 여름 휴가지를 기대하고 물었던 것일까? 내 대답을 들은 상대의 눈빛에서 금세 흥미가 사라졌다. 업무 상 어쩔 수 없이 매년 여름휴가는 8월 중순경 가게 된다. 대한민국 모두가 여행을 떠나는 8월 초를 피해 조금은 여유로운 여름휴가를 보낼 수는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 휴가 날짜를 맞추기 어려워 몇 년 간 혼자 보내다시피 하고 있다.


출퇴근 지하철 안, 틈틈이 여름휴가 여행지를 검색해 본다. 어디로 갈까? 가장 선호하는 해외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짧은 기간에 다녀올 수 있는 만족도가 높은 여행지라 몇 군데 장소를 예약까지 진행하려고 했으나, 최근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마음을 접었다. 대만이나 홍콩, 베트남 등 가깝고 저렴하게 다녀온 곳도 찾았으나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 결국은 최근 몇 년 간 매년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몇 년 전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경상북도 울진으로 이사를 했다. 경상북도 울진은 경상도 보다는 강원도에 더 가까운 지역으로 제주도를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요즘에도 비행기는커녕 기차도 고속도로도 없이 오로지 시외버스로만 갈 수 있다. 서울에서도 4시간 30분, 부산에서도 4시간 30분이 걸리는 외지라서 매년 7월 말에서 8월 초 이외에는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이다.


집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마을풍경. 매일 보면 박제된 듯한 풍경이지만 계절의 변화는 뚜렷히 느낄 수 있다.


비록 나는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매년 어린 시절 여름방학과 명절을 보낸 곳이다. 여름방학에는 메뚜기, 개구리를 잡기도 하고, 한밤에 개울가에서 발가 벗고 목욕을 하기도 하고,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오빠와 눈사람 만들던 추억이 있던 곳이다.


추억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지만 어린시절 울진에 가는 걸 매우 싫어했다. 우선 마을에 가게 하나 없어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려면 차가 없으면 나갈 수가 없다. TV 보는 것 외에는 마땅한 여가도 없다. 저녁 7시만 되면 온 마을의 신호등이 점멸등으로 바뀔 만큼 조용해진다. 그리고 희한하게 이곳에만 가면 시간이 참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시절 아침 일찍 일어나 신나게 놀았는데도 오전 10시밖에 되지 않아 남은 하루 뭐하고 보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경상북도 울진의 가치를 깨우친 건 몇 년 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한 달 간 해외를 떠돌다 돌아온 후였다. 돈도 집도 없이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이 살고 계신 울진으로 내려갔다.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전 한달 동안 숨만 쉬고 살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한달 간의 삶은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먹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점심 먹고 책보고 낮잠자고 강아지 데리고 산책하고, 저녁 먹고 잠드는 삶이었다. 저녁 반찬은 텃밭에서 고추 호박 가지 상추를 따서 된장과 고추장에 찍어 먹었고, 방울토마토와 옥수수는 꿀맛같은 간식이었다. 가끔 엄마가 장에 가실 때 따라 나가 팥빙수 한 그릇 먹고 들어오는건 별난 재미였다. 그런데 신기했다. 어렸을 때 그렇게 지루했던 하루였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건강해졌다. 잠도 푹자게 되고 살도 술술 빠졌다.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 생활에 지친 주인공 혜원이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 1년간 먹고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영화 마지막에 힘들 때면 돌아와 쉴 곳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임용시험에 떨어지고 도망치듯 돌아온 고향은 변한 것도 새로운 것도 없지만 혜원이를 엄마의 품처럼 받아주었다. 


자연에도 사계절이 있듯이 인간의 삶에도 사계절이 있는 법이다. 온갖 대지의 영양분과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무럭무럭 쉴 새 없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야 할 때가 있고, 잠 못 이루기 어려울 만큼 더운 요즘 같은 날에는 그저 마루에 누워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라야 할 때가 있다. 


언제든지 가면 나를 받아주는 곳,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종일 잠만 자도 괜찮은 곳. 힘들면 돌아갈 수 있는 곳.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곳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아지트다. 남들이 보기에 늘 같은 곳으로 떠나는 휴가이지만, 하루하루 변화무쌍한 도시의 삶과 반대되는 곳, 시간과 계절의 변화 외에는 한결같은 곳, 심리적 아지트에서 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어제보다 더 나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