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기하지 마세요

by 고민감자

* 본 글은 서울청년센터 강북 커뮤니티 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나는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왜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드리워진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담실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눈을 굴리다가 상담실 한편에 놓인 전자시계에 시선이 닿았다.


11:50


흐릿한 시선으로 숫자가 깜빡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윽고 선생님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 우리 이걸 연습해 봅시다. ‘나 전달법’이라고 하는 건데.”


생소한 이야기에 갸웃했지만, 선생님은 말을 이어갔다.


“우선 첫 번째는, 사실만 나열하는 거예요.”
“사실이요?”
“그래요. 그때 느꼈던 감정 같은 건 일단 미뤄두고, 담백하게 사실만 먼저 떠올려 보는 거죠. 여기에 써 볼까요?”


선생님은 종이와 펜을 건네며 말했다. 펜을 받아 손에 쥐고 최대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떠올려 보았다.


“돈가스가 먹고 싶어서 장터에 갔고, 주문을 한 뒤에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뒤늦게 오셨던 어떤 아주머니가 차례를 지키지 않고 제가 가져가야 할 돈가스를 먼저 집어 들었어요. 아주머니는 제 동의를 얻지도 않은 채 ‘미안합니다~.’라는 말만 던지며 후다닥 장터를 빠져나갔어요.”


상황을 떠올리자 다시 짜증이 났다. 나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계속 펜을 끄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은 곧 덧붙여 말했다.


“다음은 그 사실에 대한 내 느낌을 나열해 봐요.”


선생님의 말씀에 마음을 움켜쥔 고삐를 조금 늦추고, 그날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당황스러웠고 화도 났다. 아주머니의 무례한 행동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수치심까지 밀려들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싫은 소리를 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인간관계는 항상 비슷하게 흘러갔다. 누군가 선을 넘어오고, 나는 꾹 참는다. 그러다 그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린다.

좋은 마음으로 늘 상대방에게 맞출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이런 방식의 인간관계는 대체로 내게 견디기 힘든 짐이 되었다. 대화할 땐 상대방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살피며 어떤 말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지 걱정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내가 눈치를 보는 만큼 나도 배려받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늘 궁합이 맞는 사람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의 이런 성향을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마음대로 선을 넘나드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들은 내게 인간관계에 대한 환멸을 선사했다. 관계를 하나하나 내 손으로 끊어내며 은둔에 이르기까지 나는 꼭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걸까 하는 회의감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결국 그랬다. 배려하는 건 좋았지만 ‘나’를 지킬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이런 내 성격에 신물이 나서 그 원인이 무엇일까 수많은 시간 마음속을 떠돌았다. 기억 속을 나뒹굴던 부정적인 경험들이 한데 뒤엉켜 이젠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도 모르겠지만, 혼란스러운 실타래를 풀며 감정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늘 하나의 기억에 다다른다.



너무 오래전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인 아주 어린 시절이었으니 대략 만 3세에서 4세 정도의 시기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갈 때면 떡고물이라도 생길까 기대하며 뒤를 쫓아 나서곤 했다. 장터로 향하는 길엔 아담한 피아노 학원이 하나 있었는데, 미닫이 유리문을 덮은 형형색색의 시트지와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은 늘 장터를 오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노 학원을 지나며 어머니는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감자야 피아노 배워볼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답했다.


"아니."
"왜?"
"으음... 그냥."
"피아노 학원 다니자. 엄마가 알아봐야겠다."


피아노가 싫은 건 아니었다. 물론 좋지도 않았지만. 피아노 학원에 가고 싶지 않았던 건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가면 낯선 환경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에는 그게 너무 무서웠다. 어머니는 그 후로도 계속 피아노 학원에 가자며 날 보챘지만, 그럴 때마다 완강하게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한동안 어머니와 티격태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어머니는 피아노 학원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어머니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그래 알았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깊은 실망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처음 보는 반응에 순간 흠칫했지만, 이미 어머니의 고집에 너무 지쳐 더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아 침묵을 지켰다.


그 뒤로 며칠간 어머니는 피아노 학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의 피아노 학원 강요는 내게 상당한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념한 게 아니었다. 대신 무언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류를 느끼기 시작한 건 수일이 더 지난 뒤였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저녁거리 장을 보러 집을 나섰고 나는 여느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부랴부랴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신발장에서 샌들을 챙겨 신은 뒤, 늘 그랬듯 어머니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은 허공을 휘젓고 있었고 어머니는 이미 대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허겁지겁 어머니를 쫓아가며 외쳤다.


"엄마 같이 가!"


내 목소리에 어머니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지만, 곧 눈을 흘기고는 대문을 나섰다. 평소와는 다른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무언가를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TV를 보며 꼭 사달라고 하려던 과자 생각은 잠시 집어넣고 조용히 어머니를 따라갔다.


어머니는 장을 보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어머니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장을 따라나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어머니가 계산대로 향하려는 찰나, 잽싸게 과자 판매대로 가서 눈도장을 찍어두었던 과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이거 먹고 싶어.”


어머니는 대꾸하지 않고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나 이거 사줘. 응?”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더니 내 손에 들려있던 과자를 뺏어 무심하게 장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과자 따위는 까맣게 잊고 얼어붙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자 관계에 서린 알 수 없는 싸늘함에, 나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외출할 때마다 꼭 손을 잡으라고 당부하던 그녀는 아들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그 손을 잡으려는 기색 또한 없었다.


갑자기 돌변한 어머니의 태도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두 감정은 이내 한데 엉켜 공포로 마음속을 뒤덮었다. 어머니와 이대로 영원히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부모님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내게 트라우마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며칠 정도를 더 지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그 상황을 더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변화의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는 처음엔 무슨 이야기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더니 이윽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니 엄마는 네가 피아노 학원도 안 간다고 하고 그러니까...."


심란했다. 그리고 내가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차갑게 변한 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피아노 학원을 가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의 마음을 잃을까 하는 불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길 꼬박 하루. 결국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피아노 학원 갈래."

"너 안 가고 싶다면서?"


어머니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 반가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나 피아노 학원 갈래. 피아노 학원 가고 싶어."
"진짜? 피아노 학원 갈래? 그럼 매일 봤던 거기로 갈까?"
"응..."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귀신이라도 들렸다가 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바뀐 어머니를 보고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게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어머니는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학원 생활은 내가 걱정한 만큼 괴롭진 않았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서툴게 피아노를 뚝딱거리는 내 모습을 진심으로 예뻐해 주셨고, 나는 다른 원생들에게도 학원 막내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피아노 학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어머니는 피아노로 그치지 않고 미술, 태권도, 서예 등 온갖 학원으로 내 일과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피아노 학원으로 실랑이하며 날 다루는 노하우를 터득했던 것 같다. 마치 연을 띄우듯, 어머니는 애정이라는 줄을 노련하게 당기고 풀며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모든 순간이 괴로웠던 건 아니지만, 억지로 다닌 학원들은 대체로 내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노는 걸 더 좋아했다. 중간에 다른 길로 새는 것도 부지기수로 학원에 가야 할 시간에 문구점 앞 오락기에서 시간을 보내다 일정을 놓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폭발한 건 아버지였다.


"아니 학원 별로 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 애 뭐 하러 학원을 계속 보내? 돈이 썩어나?"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아니 그래도 애가 하고 싶다니까..."

"하고 싶은 애가 저래? 한두 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윽고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너 학원 계속 다니고 싶어?"


마음속에 있는 대답은 확고하게 '아니'였다. 하지만 옆에서 애처롭게 날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눈빛에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왔다.


"응..."
"그럼 똑바로 다녀.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학원 보내주는 건데 왜 똑바로 안 해?"


아버지는 오락기 앞을 기웃거리고 학원을 성실하게 다니지 않는 내 모습에 ‘주의산만’, ‘의지박약’ 같은 표현까지 동원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어머니는 당신 욕심으로 생긴 부부 갈등의 화살을 내게 돌렸고 부모님 중 어느 쪽과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걸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당시 아버지의 그런 말에 기분이 나쁜 것보다도 아버지에게 밉보였다는 게 더 속상했다.

내 유년 시절은 그렇게 감정을 억누르고, 나를 잃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멀어질까 두려워 마음을 숨겼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보다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삐빅”


정오를 알리는 전자시계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종이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자들이 오래도록 쌓여온 감정의 잔해처럼 남아 있었다.


“다 됐나요?”


펜을 쥔 손이 멈춘 내게 선생님은 말했다.


“그럼 마지막이에요. 지금까지 정리한 걸 바탕으로,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뭔지 말해볼까요?”


말라붙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이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새치기하지 말고 줄 서세요. 아줌마!”


다소 엉뚱한 외침에 선생님은 웃음을 터뜨렸다. 속으로 “음… 이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연습하면 더욱 좋아질 거란 선생님의 말씀에 오랫동안 날 짓누르던 무언가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의 햇살은 그날따라 유난히 따스하게 상담실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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