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것없는 하루

by 고민감자

* 본 글은 서울청년센터 강북 커뮤니티 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서울청년기지개센터 집들이에 초대합니다!”


더위는 가셨지만 푸른 녹음(綠陰)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던 늦여름. 내가 이용 중이었던 고립은둔청년 복지 시설로부터 정식 개소를 알리는 초대 문자가 날아왔다.

은둔 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은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시기. 솔직히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고자 도움을 청한 곳이었지만 크게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게다가 집들이 파티라니. 북적일 센터를 상상하니 더더욱 가기 싫었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특이점은 언제쯤 올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뭐야 결국 일 안 하고 놀고먹으며 지내고 싶다는 뜻이잖아.”라고 생각할 것 같지만, 내가 바랐던 건 조금 다르다. 방에서 나오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보다도 내가 간절하게 바란 건, 사람과 만날 일이 없는 삶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고, 타인과의 접촉 없이 기계가 시키는 일만 하면서 사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흡사 매트릭스 세계관을 방불케 하는 생각이다. 나는 사람을 일절 대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적어도 당분간은 불가능해 보였다. 죽지 못해 산다 해도 결국 살 거라면 언제까지고 방 안에 숨어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말 가기 싫었지만, 기지개센터 개소식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센터까지는 대략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혜화역에서 내려 센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지하철역에서 기지개센터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센터 바깥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1층 입구로 들어서자 매니저가 반겨주었다. 입구에서 집들이 참여 도장판을 받고 센터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내 눈에 들어왔던 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 센터는 가히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북적이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보자마자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그냥 집에 갈까.”


어렵게 용기를 내 찾아왔는데 사람까지 많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고, 웃고 떠드는 소리에 나는 도착하자마자 기가 다 빨리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 보면 예민하다는 건 정말 고립되기 좋은 성향인 것 같다.

만약 혼자 어디론가 놀러 가서 그런 광경을 마주했다면 그냥 집에 왔을 것 같다. 하지만 그날은 단순히 놀려고 센터에 나간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다시 세상과 연결되어야만 했고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래서 내키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센터 안쪽을 살폈다.

집들이는 준비된 여러 가지 코너에 참여해 도장을 모으는 방식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도장을 모으면 모은 도장에 따라 선물도 주는, 그런 익숙한 방식이었다. 도장판을 꼭 쥐고 센터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북적이는 가운데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집에 가고 싶다...”라 새겨진 유니폼을 맞춰 입은 매니저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직장인의 애환을, 한편으로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준비된 코너를 살펴보았다. 숨은 그림 찾기, 걱정인형 만들기, 인생네컷 등 다양한 코너가 준비되어 있었고 먼저 도착한 청년들은 이미 도장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참여하려고 하니 프로그램을 도와주는 매니저에게 무슨 말을 먼저 건네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들어가서 “저 이게 할게요.”라고 하면 되나? 아니면 실례합니다? 저기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누군가와 대화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물쩡거리던 나는 센터 중앙에 위치한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주방에서는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불러주는 작은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도장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루고 콘서트를 구경해 보기로 했다. 사실 매니저에게 말 걸기 무서워서 그런 거지만 콘서트를 보고 싶은 거라 애써 되뇌면서.


그렇게 30분 정도를 멀뚱멀뚱 서 있었던 것 같다. 초점을 잃은 눈에는 공연 중인 보컬과 피아니스트가 흐릿하게 담겨 있었고 노래는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나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힘들게 왔는데 그래도 뭔가 해야만 한다는 생각과 사람과 대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난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그나마 쉬워 보이는 숨은 그림 찾기를 먼저 해 보기로 결심했다.


숨은 그림 찾기는 책방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담당 매니저에게 말을 걸기 전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뭐라고 말하면서 시작해야 하지? 저 이거 할게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거 뭐예요? 그러면 매니저가 참여 방법을 안내해 준다. 좋아 그렇게 될 거야. 근데 만약 매니저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지만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리를 잡은 뒤 매니저에게 말을 건넸다.


“이거 해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아 안녕하세요! 여기 색연필로 그림에 숨어있는 물건 칠해서 저한테 보여주시면 도장 찍어 드릴게요!”


숨은 그림 찾기 매니저는 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서는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림에 머리를 박고 숨어있는 물건을 찾아 하나하나 색연필로 칠했다. 그리 어렵진 않아서 5분이 채 되지 않아 숨은 그림을 모두 찾았고 매니저에게 종이를 건넸다. 매니저는 다른 코너도 참여해 보라 독려하며 도장판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처음이 어렵다.”라는 말을 새삼 느꼈던 것 같다. 그냥 매니저와 말 몇 마디 나누고 숨은 그림 찾기 한 번 했을 뿐인데 두려움이 씻겨 나가기 시작했다. 마음을 휘젓던 폭풍은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그렇게 걱정 인형 만들기, 하바리움 만들기, 인생네컷 등에 참여하며 두 번째, 세 번째 도장을 차곡차곡 모았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오랜 은둔생활로 잊고 있었던 사람과의 연결을 다시 떠올렸던 것 같다.


도장판에는 도장을 총 8개까지 모을 수 있었고 각각 4개, 8개를 모을 때마다 선물을 줬다. 집들이가 마무리될 때 즈음 내 도장판에 찍혀있는 도장은 총 7개였다. 시간이 다 되자 매니저들도 많이 지쳤는지 행사를 시작할 때의 밝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간 관계상 참여할 수 없는 코너에서는 선물이라도 받아가라고 그냥 도장을 찍어주고 있었다. 나는 진이 너무 빠져서 그냥 7개 모은 걸로 받을 수 있는 선물만 들고 센터를 나서기로 했다.


“도장 한 개 못 받으셨구나... 너무 아깝다.”


출구에서 선물을 나눠주던 매니저가 말했다. 피곤했던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얕은 미소를 지은 채 목인사를 하며 빠져나왔다.


센터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와 드디어 끝났네.” 맥없이 중얼대며 센터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 도장을 받지 못했다는 건 아쉬웠지만 어쨌든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은 홀가분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지쳐있었지만, 여러 내적 위기를 견디고 끝까지 행사에 참여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에서는 작은 뿌듯함이 번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고생했으니까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게임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하철에 타자, 알 수 없는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걸레를 짜듯 뇌를 두 손으로 비틀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그런 두통이었다. 맛있는 것과 게임에 대한 생각 따윈 까맣게 잊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머리를 싸매고 끙끙댔다. 평소와는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트레스를 억누르고 있었고 그 후유증이 뒤늦게 찾아왔던 걸까.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겐 저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싶겠지만,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던 내겐 그랬다. 다시 뛰기 위해서는 걷는 것으로 돌아와야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부터 시작하기. 소소한 성취를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사람을 조금 더 믿어보기.


돌아오는 길을 수놓은 발자국 위로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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