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보가트'라 불리는 마법 생물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마주하면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태로 변화해 겁을 주려는 특성을 지닌 생물이다. 가령 작중 주인공 해리포터의 절친한 친구인 론 위즐리는 거미를 두려워하는데, 그를 앞에 두자 보가트는 거대한 거미로 변신한다. 그 외에도 마주한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에 따라 달과 같은 물체로 바뀌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작중 마법사들이 보가트에 대처할 때 쓰는 주문은 '리디큘러스(ridiculous)'라는 주문이다. '우스꽝스러운', '터무니없는'과 같은 뜻을 가진 영단어로 이 주문을 외치면 보가트는 어처구니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한다. 론 위즐리 앞에서 거미의 모습을 했던 보가트는 주문을 외자 다리에 롤러스케이트가 달려 버둥거리는 모습으로 변했다. 스네이프 교수를 무서워하는 네빌이 주문을 외면 보가트는 어울리지 않게 할머니 옷차림을 한 스네이프 교수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무조건 주문만 외면 보가트를 쫓아낼 수 있으니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중 묘사되는 정황을 보면 보가트를 쫓아내는 게 늘 쉬운 건 아니다. 우선 내 앞에서 날 두렵게 하는 게 진짜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인지 아니면 변신한 보가트인지 파악해야 한다. 일례로 작중 최고 우등생으로 꼽히는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는 교수의 모습으로 변해 낙제점을 통보하는 보가트를 마주하자 혼비백산하며 도망쳐 버린다.
게다가 주문이 그 자체로 보가트를 쫓아내 주는 건 아니다. 설정상 진짜 보가트를 쫓아내는 힘은 진심을 담은 '웃음'이다. 주문은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린 마법사들과 달리 성숙한 성인 마법사들은 굳이 주문을 쓰지 않고도 보가트를 쫓아낼 수 있다고 한다.
작년 11월 즈음, 은둔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은 지 6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내가 어느 정도 활력을 찾은 것 같다고 판단하셨는지 상담 선생님은 운전면허를 취득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무언가 이력서에 써넣을 것도 만들어보고,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성취감을 느껴볼 만한 도전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더 컸다. 누구나 다 따는 운전면허 대체 뭐가 무섭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건 평가받는 것 그 자체였다. 물론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내가 더 두려워한 건 누군가에게 내 역량을 드러내고 그것을 평가받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운전면허 취득은 조금 미루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올해 4월. 서울시 청년수당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이런저런 활동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 국가에서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도 상태가 더 나아졌다고 판단하셨는지 상담 선생님은 다시 한번 내게 운전면허 취득을 권유하셨다.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지만, 계속 도망만 다닐 수는 없었다. 운전면허가 취업에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이것조차 없는 건 마이너스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매달 들어오는 청년수당을 조금씩 이월시키며 돈을 모았고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필기시험과 장내 기능시험은 큰 문제없이 한 번에 합격했다. 필기시험은 애초에 절반 정도는 도덕 시험에 가까웠고 기능시험도 특별히 어려운 건 없었다. 문제는 도로주행이었다.
분명 거리를 거닐면서 늘 보는 공간이었는데, 차를 타고 올라선 도로는 완전히 다른 차원 같았다. 내가 유독 운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원래 도로가 그런 공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뿐인 우회전 차로를 틀어막은 채 천천히 리어카를 끌고 계시는 할머니를 마주하거나, 횡단보도가 없는 교차로에서 돌고래 주파수로 비명을 지르며 무단횡단을 하는 아이들은 내게 혼돈 그 자체였다. 총 6시간의 도로주행교육을 마쳤지만, 나는 교육을 받기 전보다 더욱 자신감을 잃었다.
도로주행시험은 학원 근처를 도는 4개의 코스 중 임의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코스에서 치러진다. 학원에서는 각 코스별로 유튜브에 영상을 올려두었는데, 나는 단순히 코스를 외우는 걸 넘어 어느 구간에서 어느 차선을 타고 있어야 다음 블록을 대비할 수 있는지까지 전부 암기할 정도로 영상을 돌려보면서 불안감을 달랬다.
대망의 도로 주행 시험날. 아침부터 하늘이 어둑어둑하더니, 시험을 시작하기 직전이 되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환경에 나는 시작부터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 번에 붙고 빨리 치워버리고 싶었다. 시간이나 돈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운전면허와 관련된 일정이 내 일과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도로주행 시험은 시작부터 평소와 다른 루틴으로 내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감독관은 교육 때 늘 출발했던 원래 시작지점이 아닌 생판 처음 보는 지하 주차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를 뺴 시험 시작지점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이미 불안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와서인지 액셀을 밟는 느낌도 전혀 달랐다. 신발 바닥에서 마찰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발바닥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와중 나는 발목만 까딱까딱하며 순전히 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만으로 아슬아슬하게 시험 시작지점까지 차를 몰았다.
시험 시작지점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뒤, 코스를 추첨했다. 나는 고가도로 합류 구간이 있는 코스만 아니길 빌며 태블릿을 터치했다. 하늘이 도운 걸까. 4개의 코스 중 가장 쉽다고 평가받는 코스가 걸렸다.
뜻밖의 행운에 약간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 행운으로 마음을 다스리기엔 긴장감이 너무 컸던 걸까. 시험은 시작부터 삐그덕 댔다. 학원 바깥쪽으로 나오는 길. 차량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인도 쪽 차로에 서 있었다. 곧 우회전을 해야 하는 코스였기 때문에 인도 쪽 차로로 붙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정차 중인 차를 피해 가려 잠시 1차로 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우회전 차로로 복귀하려 했는데, 갑자기 감독관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른쪽을 바라보자, 비상등을 켠 채 정차하고 있었던 차가 갑자기 부앙하면서 앞으로 치고 나왔다. 만약 혼자 운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시험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미 마음은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시험은 생각지도 못한, 어이없는 곳에서 실격을 맞이했다. 좌회전, 혹은 보행자 신호 시 유턴을 할 수 있는 구간이었는데, 내가 유턴하려는 찰나 감독관은 브레이크를 밟더니 신호를 잘 보라고 했다. 어? 분명히 보행자 신호 초록불인데? 다시 보니까 엉뚱한 신호였다. 내 앞에 있는 횡단보도가 아니라 교차로 좌회전 방향에 있는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이었고 전방 차량 신호는 초록불인 상황이었다. 그렇다. 이 상태로 유턴을 했다가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과 충돌할 수도 있다.
신호 위반이었기에 감점이고 뭐고 없이 그 자리에서 실격됐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실격에 정신이 멍해져서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험에 실격하면 그 시점부터는 감독관이 차를 몰아 학원으로 돌아온다.
상상도 못 한 지점에서 맞이한 어이없는 실격. 억울하긴 하지만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실수라기엔 너무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약 혼자 운전했고 맞은편에서 차가 오는 상황이었다면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감독관은 붉은색 펜으로 '실격'이라고 쓴 뒤 내게 응시표를 돌려줬다. 평소 하지도 않던 '잘 될 거야.', '막상 하면 재밌을 거야.'와 같은 자기 암시까지 해가며 준비한 도로 주행 시험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왜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을까. 비가 많이 와서? 비 오는 것과는 상관없는 실수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물론 긴장을 많이 하긴 했다. 연습때와는 환경도 많이 달라서 더욱 그랬을 거고.
운전면허를 준비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면허를 딴다고 내게 차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당장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리 재미도 없는데 당장 내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곤 그저 신분증이 한 장 더 생기는 것뿐이다. 보상도 그저 그런데 시간과 돈, 에너지를 뺏어가고 있는 운전면허가 정말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 마음을 가장 무겁게 짓누른 건,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좌절감을 다시 마주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실패하는 것. 상담 선생님께 처음 운전면허 취득을 권유받았을 때 그걸 미뤘던 이유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세상을 등지고 방으로 숨어든 이유였다. 실체 없는 공포로 날 방 안에 몰아넣었던 그 보가트는 '실격'이라는 붉은색 글씨가 되어 다시 한번 날 응시하고 있었다.
울적한 내 마음처럼,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실격으로 우울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나는 어느 정도 평정을 찾고 왜 떨어졌을까 그 이유를 곱씹어 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돌발 상황이었다. 돌발 상황은 매 순간이 기출 변형이었고 일단 한 번이라도 나온다면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평소에는 잘 되던 차선 변경, 방향 지시등, 정지 시 기어 중립 등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기만 하면 죄다 함께 삐그덕거렸다.
하지만 돌발 상황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충분한 운전 경력이 있다면 모를까, 생초보인 내가 공식 같은 걸로 대처하기엔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그런데 내가 준비한 방법은 유튜브로 코스를 숙지하거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가정한 연습이었다. 돌발상황에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나의 예민한 성향도 과도한 긴장에 한몫했던 것 같다. 굳이 운전이 아니더라도, 나는 주변에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거나, 누군가 내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집중을 하기 매우 힘들다. HSP의 큰 특징 중 하나인 나의 이런 성향은 운전면허 시험과 정말 상극인 것이다.
정리하면 내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1.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2. 쉽게 부하가 걸려 집중력을 잃는 예민한 감각을 어떻게 진정시킬 것인가.
추가 교육을 받는 방법도 있었지만 겨우 2시간 교육이 10만 원이었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종일 고민하다가,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내가 선택한 건 게임이었다. 바로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라는 게임인데 화물 기사가 되어 유럽 대륙을 누비는 운전 게임이다. 여타 레이싱 게임과 비교되는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현실성이다. 범퍼카처럼 여기저기 들이받으며 과격한 운전을 즐길 수 있는 일반적인 레이싱 게임과는 달리, 유로 트럭은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운전감각과 교통법규를 구현한 게임이다.
나는 게임용 스티어링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키보드와 마우스로 플레이해야 했다. 물론 스티어링휠이 있다고 해도 현실 운전과는 그 느낌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운전 연습을 이 게임으로 하는 게 적절한 선택인 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운전 감각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연습하고 싶었다. 내가 신경 써서 연습한 건 세 가지였다.
1. 방향 지시등
2. 정지 시 기어 중립
3. 차선 변경 시 사이드 미러를 먼저 보는 습관
비록 현실 운전과 느낌은 많이 다를지라도, 기본적인 것들을 몸에 습관처럼 베개 만들어 의식하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다면 여분의 주의력은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데 쓸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그렇게 나는 평소엔 마시지도 않는 커피까지 들이켜가며 두 번째 시험까지 유로 트럭을 열심히 플레이했다.
두 번째 시험이 치러지는 날은 해가 쨍쨍하게 떠있는 화창한 날이었다. 나는 긴장감을 달래며 그간 외웠던 코스를 다시 한번 복기해 보았다. 그리고 복지관에서 요가 수업 중 만들었던 진정 오일을 손등에 펴 바르며 되뇌었다. 어차피 예상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거야. 돌발 상황은 분명히 발생한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해보자.
내가 첫 번째 시험에서 더욱 낙담했던 이유는 비교적 쉬운 코스로 평가받는 코스가 걸렸는데도 어처구니없이 실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같은 코스가 다시 한번 걸렸다. 나는 뜻밖의 행운에 들뜬 한편,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던 며칠 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조금은 불안감을 지닌 채 시험을 시작했다.
내가 등록한 운전 학원 근처에는 초등학교가 2개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이 스쿨존이다. 나는 스쿨존 제한 속도인 시속 30km보다도 더욱 낮은 시속 20km로 거의 기어가듯 주행했다. 천천히 가면 어떤 일이 생겨도 더 여유를 갖고 대처할 수 있을 거란 심산이었다. 감독관은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옆에서 연신 하품과 한숨을 반복했지만 알 게 뭔가. 나는 또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침착하게 천천히 주행한 덕분일까. 중간중간 날 당황하게 만드는 차들이 있긴 했지만, 큰 실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별다른 이변 없이 시험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학원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날 맞이한 건 길을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관광버스였다. 관광버스는 후진으로 골목길을 나오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앞쪽으로는 갈 수가 없어서 후진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학원을 드나드는 골목길은 승용차 두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다. 그런 공간에서 거대한 관광버스가 나오고 있으니 나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여기만 지나서 학원으로 들어가면 끝인데! 설마 저 관광버스 때문에 나도 이 골목을 후진으로 나가야 하는 건가? 나는 주차할 때 빼곤 후진을 해본 적이 없는데. 저 아저씨는 왜 하필 내가 시험 보는 날 내가 시험 보는 시간에 길을 잘못 드는 실수를 한 걸까. 온갖 생각이 겹쳤고 버스 아저씨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후진으로 나오는 관광버스가 제발 옆 공간으로 무사히 나가 주길 바라며 길 한편으로 최대한 바짝 차를 붙였다. 마음을 졸이며 후진하는 버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기적처럼 지나갈만한 공간이 생겼다. 감독관은 옆에서 "지금 갑시다."라고 말했고 나는 잽싸게 학원으로 돌아왔다.
학원으로 돌아와 시험 종료 지점에 차를 무사히 대고 시동을 끄자. 감독관이 나지막이 말했다.
"감자씨 합격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면허시험장 가서 면허증 발급받으시면 됩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안전벨트를 풀며 옆을 바라보니 태블릿에 93점이라는 점수가 보였다. 어디서 7점이 감점된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사실 내게 차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당장 면허증이 생기는 것 자체는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더 이상 학원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시뮬레이션과 연습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뻤다.
이제 운전면허로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입가엔 미소가 젖어들고 있었다. '실격'이라는 모습으로 내 앞에 섰던 보가트는 어느새 합격도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리디큘러스"를 외칠 필요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에 날 방 안으로 몰아넣었던 그 보가트는 쪼그라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학원에서 역까지 걸어가는 길. 늘 피부를 뜨겁게 달구는 것 같아 거슬리기만 했던 햇살이 그날따라 유난히 따사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