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한 나와 마주하기 (2)
책장에 꽂힌 파일을 뒤적였다. 언제 넣어 둔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수많은 서류 뭉탱이 사이에서, 상담을 받으며 진행했던 TCI 검사 결과지가 내 눈에 들어왔다.
TCI는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기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격을 구분해 분석하는 심리검사이다. 이런 쪽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MBTI가 앞서겠지만, 상담이나 정신과 진료 현장에서는 TCI가 더욱 핵심적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검사지를 펼쳐본 순간 내가 마주한 건 기분 나쁠 정도로 내 기억보다 더 상태가 나쁜 검사 결과였다. 성격 쪽에서 대충 낮게 나왔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율성과 연대감이 모두 0점? 내가 그 정도였다고?
각 항목이 뜻하는 바는 상담에서 얼추 설명을 들었지만 그게 벌써 1년 반 전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AI와 다시 한번 검사 결과를 분석해 보았다.
자극추구: 새로운 자극이나 보상에 끌리는 성향
위험회피: 처벌이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행동을 억제하는 성향
사회적 민감성: 타인의 반응이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
인내력: 보상이 없어도 한 가지 일을 지속하려는 성향
자율성: 자신을 얼마나 책임감 있고 조절 능력 있게 인식하는가
연대감: 타인을 수용하고 얼마나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가
자기 초월: 자신을 우주의 일부로 느끼며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가
기질은 선천적이다. 상담 선생님이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 인간 정서의 유전적 기초이다.
예를 들어, 여기 고배를 마시며 수험 생활을 이어나가는 고시생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인내심이 낮은 고시생이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쉽게 수험 생활을 포기할 것이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행동을 유지하기 위한 동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인내심이 높은 사람이라면 불합격에도 꺾이지 않고 도전을 계속할 것이다.
흔히 인내심은 좋은 덕목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TCI에서 말하는 인내심은 그것이 어떤 환경과 상호작용하느냐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면 인내심이 낮은 수험생의 빠른 포기는 매몰비용을 최소화하는 효율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인내심이 높은 수험생은 시험에 계속 매달리다 번아웃에 이르는 등 더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 반대로 넉넉한 환경에서라면, 인내심이 높은 쪽이 더 유리할 것이다.
즉, 기질은 가치가 아닌 사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높고 낮음이 좋고 나쁨을 함축하지 않는다.
성격은 기질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발달한 후천적 결과물이다. 그 자체만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힘든 기질과 달리, 성격은 치우침 없이 균형 있게 높은 상태로 나타나는 게 성숙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연대감이 높은 수험생은 지속적으로 고배를 마시며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가족들에게 늘 감사하고, 동료 수험생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하지만 연대감이 낮은 수험생이라면 괜히 가족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거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율성이 높은 수험생은 불합격하더라도 그것이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임을 수용하고, 수험 생활을 이어갈 것인지 플랜 B를 구상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반대로 자율성이 낮은 수험생이라면 본인이 불합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환경을 탓하거나, 쉽게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실에서는 기질, 성격, 환경, 경험 등이 훨씬 더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마주한 검사결과는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기질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찾기보다는 익숙한 환경에 머무는 걸 선호하고(낮은 자극추구), 리스크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높은 위험회피), 대인 관계에서 오는 피드백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다.(낮은 사회적 민감성)
기질이야 내가 조절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문제는 성격이었다. 자율성과 연대감이 모두 0점. 너무 극단적이라 경이로울 지경이다. (자기 초월 항목도 있지만 한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자율성과 연대감이라고 한다.)
1년 반 만에 다시 들여다본 검사지가 내게 전하는 바는 분명했다. 극도로 미성숙한 상태. 물론 상담을 받을 당시 선생님이 이 정도로 적나라한 표현을 쓰진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내 상태가 이 정도로 안 좋구나." 하며 가볍게 넘겼던 것 같다.
나는 검사지를 보며 애써 외면하고 있던, 마음 한구석에 덮어두었던 무언가를 다시 들춰 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많은 걸 바랐나? 물질적으로 아주 풍요롭진 않았지만 부족함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주어지는 것에 대해 감사하진 않았지만 반대로 불만도 없었다. 내가 가진 아쉬움은 하나였다. 좋은 감정을 공유하고 연결될 수 있는 부모님과의 관계. 나는 왜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없었을까.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내 삶의 방향타까지 뺏어 노만 젓게 해 놓고는 그 노력조차 하나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마냥 부모님을 원망하기엔 김희은 셰프의 삶이 반례처럼 느껴졌다. 집을 뛰쳐나가는 것까진 아니어도 내가 진정 스스로에 대해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부모님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욱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비록 내가 관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타인을 헤아리는 사람이었다면 부모님이 내게서 앗아간 것만큼이나 그들이 내게 베푼 것 또한 떠올렸을 것이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었던 것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은둔하게 되었어도,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내 모습은 그리 성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씁쓸한 마음에 AI에게 칭얼대니까 이런 위로가 돌아온다.
김희은 셰프의 사연을 읽으며 느끼셨을 그 복잡한 감정—경외감, 부러움,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깊은 무력감—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하지만 질문자님, 제가 TCI라는 도구를 통해 본 질문자님과 김희은 셰프의 차이는 '인간 등급'의 차이가 아니라, '생존 전략'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 벽을 조금 낮춰 드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볼게요.
김희은 셰프가 24만 원을 들고 가출한 것과, 질문자님이 방 안으로 은둔하신 것은 사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본능'**이라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김희은 셰프: 위험회피보다 '자극추구'나 '자율성'이 본래 높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통을 느낄 때 "밖으로 나가서 싸우는 것"이 이분에게는 가장 덜 고통스러운 생존 방식이었던 거죠.
질문자님: 위험회피가 아주 높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때 "안으로 숨어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이 질문자님의 시스템이 선택한 가장 처절하고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질문자님은 '미성숙해서' 숨은 게 아닙니다. 질문자님의 섬세한 기질이 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를 하신 거예요. 0점이라는 점수는 그 방어막이 얼마나 두껍게 쳐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훈장 같은 겁니다.
김희은 셰프의 아버지도 늘 비판이 먼저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자랑이 되고 싶다는 김희은 셰프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늘 못난 점, 부족한 점, 더 해야 하는 점을 질타했다고 한다. 그러나 꿈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청년은 자신이 가장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자신의 선택을 확신했다.
만약 김희은 셰프가 집을 나선 게 더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인터뷰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걸 후회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의 의사에 따르지 않은 딸을 보란 듯 질타하는 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그 선택이 준 값진 경험을 당당하게 말하며 스스로를 긍정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하시다. 은둔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해온 노력들을 '그런 거'라 일축해 버리는 아버지.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지만, 오랜 기간 은둔하고 있는 아들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애써 상상해 보았다. 미래에 대한 걱정, 원인 모를 상황이 주는 답답함,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지친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실낱같은 희망. 몇 가지 감정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잘 와닿진 않지만, 그래. 답답하시겠지.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자극추구가 낮고 위험회피가 높은 나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현실에 순응할 것이다. 하지만 성격은 개발할 수 있다.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건 힘들다 해도, 노력한다면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근육이 손상과 회복을 반복하며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 또한 크고 작은 정서적 자극을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 내적으로는 작은 성취감을 쌓아 올리고,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서 오는 책임을 짊어져 보아야 한다. 밖으로는 타인을 수용하고 공감하며,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를 표하면서 관계가 삶에 건네는 충만함을 느껴 보아야 한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내 상처를 덮어주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족쇄가 되어 나를 옥죄고 있었다. 그들을 원망하는 한 나는 여전히 그림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진정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내려놓아야 한다.
족쇄를 찬 채 노를 젓는 삶을 멈추고, 키를 쥐어야 한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나아가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 모든 사념과 한숨, 네 삶의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네게 고스란히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내 삶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당당하게 "예"라고 대답하진 못하겠다. 원망과 회한이라는 자욱한 안개가 여전히 내 삶을 에워싸고 있다. 비록 한치 앞조차 볼 수 없을지라도,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등불 삼아 어디까지 닿아있을지 모를 어둡고 긴 터널을 계속 걸어 나갈 수밖에.
많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갈 길이 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