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30기에 대한 소고(小考)
나는 유튜브를 끌어안고 산다. 팝콘 브레인, 브레인 롯(rot), 디지털 치매 등 쇼츠가 지배하고 있는 요즈음의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단어들조차 내 머리에 들어오려면 유튜브를 거쳐야 한다.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지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멈추는 게 쉽지 않다.
그런 내 유튜브 알고리즘에 꽤 자주 등장하는 프로가 있는데 바로 연애 예능 "나는 솔로"이다. 소위 "빌런"이라 불리는 출연자의 활약상이 유튜브 쇼츠로 돌아다니는 걸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럴 때면 궁금한 마음에 본편도 한 번씩 찾아서 보게 된다.
이번 기수에서 내 이목을 끈 쇼츠는 꽤 자극적이었다. 남성 출연자에게 운전이 서툴다는 이유로 막말을 내뱉는 여성 출연자. 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저러고 있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30기 정주행을 시작했고, 처음부터 보니 그 장면도 나름대로의 맥락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솔로 30기를 첫 화부터 쭉 시청했고 이번 주에 마지막화가 공개되었다. 늘 그랬듯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이 출연했지만, 이번 기수에서는 전과 달리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영수는 잘 생겼다. 얼굴뿐 아니라 키도 훤칠한데 운동까지 열심히 하는지 몸도 좋다.
영수는 영자에게 마음이 있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어렵사리 영자와 대화를 시작한 영수는 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영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쑥스러워한다.
첫 데이트 선택 시간. 영수는 충격적인 0표를 기록한다. 외적인 조건이 훌륭한 영수가 0표란 사실에 여성 출연자들도 술렁인다. 하지만 가장 충격이 큰 건 영수 본인. 하루 종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게다가 무슨 생각인지 그다음 날 오전 데이트 선택에서는 엉뚱한 순자에게 간다. 그리고 당일 밤이 되어서야 힘들게 영자에게 다시 대화를 건넨다.
대화하면서 영수는 영자 또한 본인에게 적잖이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영자는 오전에 순자를 선택한 영수를 보고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뒤 영식에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 영자는 일정의 절반이 지나서야 다시 찾아온 영수에게 일말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이제 와서 영수 때문에 영식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정리하기엔 꽤 먼 길을 온 건 사실이라며 솔직한 심정을 전한다. 그 말을 들은 영수는 어렵게 대화를 시작한 게 무색할 정도로 칼같이 영자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런 영수에게 순자와 옥순이 다가온다.
영자를 정리했지만 여전히 호감을 표하는 여자가 둘이나 있는 영수. 그런데 영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던 영수가 180도 달라진다. 마치 익숙한 위치에 다시 선 것처럼, 뒤늦게 찾아온 두 여자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보이며 갑으로 군림한다. 어느 쪽이든 단 둘이 있을 때는 조금씩 호감을 표하면서도, 대외적으론 두 여자를 비슷하게 대하며 능숙한 밀당을 구사한다.
순자에게 숙취 해소제를 건네며 하는 말은 둘을 대하는 영수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난 재밌게 구경할게. 어디 한 번 피 터지게 싸워봐.
몸 좋은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밝힌 순자는 영수바라기 그 자체이다. 영수 앞에만 서면 도저히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어쩔 줄 몰라하는 수줍은 소녀가 된다. 반면 옥순은 조심스럽다. 얼핏 보면 그냥 잘 웃고 매사 긍정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영수와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룸메이트 순자와 경쟁해야 한다는 게 편치 않다.
그렇게 영수를 두고 시작된 두 여자의 애정 공세. 하지만 두 여자가 영수에게 어필하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순자는 적극적이다. 자그마치 영수가 "먼저 다가와준다는 이유로 호감을 느낀 건 처음이다."라고 할 정도로. 하지만 기대만큼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영수에게 뾰로통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경쟁자인 옥순 앞에서 진전된 관계를 과시하려다 영수의 역린을 건드리기도 하는 등 자책골의 연속이다.
"(매력은) 둘 다 있고 비슷한 정도니까. 무게의 추를 상대한테 넘기는 거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조금 더 생각해 주냐."
"그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니에요?"
"말했잖아. 내가 두 사람한테 느끼는 이성적 매력이 비슷하다고."
"으응... 그렇죠."
"어쨌든 선택을 해야 되잖아. 둘 중에서. 그럼 이제 볼 수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냐지."
"그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옥순은 순자만큼 적극적이진 않지만 신중하고 사려 깊다. 영수의 말을 경청하고, 영수가 불편해할 법한 이야기는 예리하게 피한다. 옥순 역시 상대방에겐 끝없이 증명하라 요구하면서 본인의 선택은 유예하는 영수의 태도를 비겁하다 생각하지만, 그런 모습까지도 포용해 보려 노력한다.
상반된 두 여자의 태도에 점점 순자에게서 마음이 떠나 옥순과 가까워지는 영수. 일정이 막바지로 접어든 5일 차 밤 영수는 이미 포기했던 영자와 다시 대화해 보겠다며 옥순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지만, 결국 최후에는 그 모든 걸 감내하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옥순을 선택한다.
본인 감정은 철저히 숨기면서도 먼저 호감을 표하며 다가와준 사람들에겐 가학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질게 싸움을 붙이는 영수의 모습. 넷상에서는 그런 모습을 알파 메일의 삶이라 우러러보는 반응도 있었지만, 내 생각은 옥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택을 상대방에게 미루고 그 결과를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 비겁한 모습이다.
그런데도 옥순은 한결같이 영수에게 마음을 표현했다. 너무 한결같아서 보는 내내 "역시 연애시장에서는 외모가 최고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 상 최종 커플이 거의 확정된 5일 차 저녁까지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영수의 모습에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마지막화 인터뷰에서 옥순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나솔의 기운이 옥순한테 향하는구나. 아니 진짜 와서는 계속 느끼는 거예요. 누구를 선택하든, 그리고 제가 누구한테 까였든, 모든 순간들이 제가 너무 잘 되게끔, 제가 너무 좋은 선택을 하게끔 따라와 줘서 좋아요 사실.
옥순이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애정관계에서 더 좋아하는 쪽이 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영수가 보인 태도는 단순한 주도권 다툼을 넘어 갑질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모든 상황이 너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따라와 주고 있다는 옥순. 그녀는 더 많은 것을 내려놓았음에도 을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시종일관 영수에게 끌려다니는 듯했지만, 그런 관계마저 본인의 선택이었다고 긍정하는 그녀의 내면은 갈팡질팡하는 영수를 오히려 기다려주는 모습이었다.
만약 내가 옥순이었다면 어떤 인터뷰를 했을까.
"마지막 날까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없으면 확실하게 끊어주든지 사람 피 말리는 것도 아니고. 잘 되면 좋겠지만 너무 괴로운 것도 사실이에요."
아마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
옥순은 선택할 수 있었다. 애매하게 구는 영수를 빨리 정리하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거나, 그마저도 없다면 남은 시간을 그냥 즐겁게 보내거나. 하지만 옥순은 끝까지 영수와의 관계를 놓지 않으면서 본인도 무너지지 않았다. 내면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타인에 대해서도 놀라운 수용력을 보이는,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한 때 세상을 미워하고 등졌던 내가 너무나 동경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왜 하필 물통을 저기에 놓아둔 거야."
아침 7시 아파트 헬스장. 내가 곧 써야 하는 기구에 어떤 아주머니가 물통을 올려두었다. 정작 그 기구를 쓰지도 않으면서. 나는 툴툴대며 다른 기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언제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우나 예의주시하며 운동을 이어갔다.
짜증 나긴 하지만 자주 있는 익숙한 상황. 그런데 문득, 다른 생각이 밀려왔다. 분명 저 아주머니가 물통을 올려두지 않았다면 나는 예정대로 빨리 저 기구를 쓰고 집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다. 아주머니에게 물통을 치워달라 양해를 구하고 기구를 쓰거나, 그냥 기다리거나. 그런데 나는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내 앞에 펼쳐진 게 외길이라 생각하며 후자를 선택했다. 괜히 부대끼는 상황을 만들기 싫어 다른 기구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 건 전적으로 내 선택이었음에도, 나는 습관처럼 그것이 내 선택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을 고쳐먹은 나는 일어나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말을 건네려는 찰나, 아주머니가 물통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나는 머쓱했지만, 내심 편안한 마음으로 기구에 앉았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도저히 다른 길이 없어 보이는 인과의 사슬 속에 자유로운 의지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 삶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이한다. 이런 하찮은 고민들 하나하나가, 끌려다니는 삶에서 주인이 되는 삶으로의 걸음이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