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별빛과 조우, 어린 시절, 고향 마당에서 올려다보던 밤하늘에는 깨알 같은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별을 보며 동심을 키웠던 그때와는 달리 요즘은 간편한 전자상품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잠시도 차분하게 생각할 겨를 없이 달콤한 대중매체의 고삐에 끌려 다닌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별의 개수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별을 보며 자신의 꿈을 별빛에 빗대어 표현한다. 또한 별자리로 미래를 점쳐 보기도 한다. 별은 그만큼 우리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 혹은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노래하게 되는 아주 먼 우주의 거리에서 보내오는 작은 신호이다. 문득 이승하 시인의 시를 읽다가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빛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도심의 하늘은 언제나 어둡고 춥게만 느껴진다. 한두 개의 별빛만 겨우 보일뿐이다. 취해서 귀가하는 어느 밤이 온다면 집에 당도하기 전에 꼭 한 번 하늘을 보아라 별이 있느냐? 별이 한두 개밖에 없는 도회지의 하늘이건 별이 지천으로 돋아난 여행지의 하늘이건 뼈아픈 별 몇 이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 잠이 들어야 한다 아들아 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 밑에서 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아들아 네 등 뒤로 떨어지며 무수히 죽어간 별똥별의 이름은 없어 뼈아픈 별이기에 영원히 반짝이지 않는단다. 이승하 시인의 “뼈아픈 별을 찾아서ㅡ아들에게” (전문) 시인은 어느 날 밤 마음의 상처를 안고 돌아오며 밤하늘에서 뼈아픈 별과 조우하였다. 그리고 그 아픔을 마치 등 뒤로 떨어져 죽어간 수많은 별똥별처럼 자신의 아픔을 아들에게 당부하듯 노래하였다. “집에 들어가기 전/ 뼈아픈 별 몇 이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면서 뼈가 쑤시고 아플 만큼 아주 강한 통증을 별빛에 호소하고 있다. 어느 시인은 몽골의 초원에는 별빛이 주먹만 하여 달려가면 금방이라도 손안에 쥘 수 있을 것만 같다고도 표현한다. 하지만 나는 몇 년 전, 원주 치악산 문학행사에 참가하여 산속에서 바라보았던 별빛만이 아직도 가슴속에서 꿈틀거린다. 얼마나 크고 밝았던지, ‘무공해 별’이라고 칭하고 싶다. 가슴 설레며 두근거리게 했던 그 별빛을 카메라에 잡으려고 좀 더 가까이 산 능선 쪽으로 걸어가 보아도 제자리였던 ‘무공해 별’, 그 별과의 눈 맞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십여 년 전 나를 떠나간 아이의 눈망울처럼, 무슨 말인가 울먹이듯 별빛은 한참 동안 출렁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도 무슨 말인가 대답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별은 그대로 제자리였다. 마치 뼈아픈 별에게 아픔을 노래하던 이승하 시인처럼 지울 수 없는 내 안의 트라우마를 그날의 별빛에 담아서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