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비밀이야
연포항 밤바다 불빛과 어우러져 출렁이는 파도 소리는 쓸쓸한 고독남 천석에게 더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두 아들을 군대 보내고 나서 집 안에 들어서면 반갑게 맞아주는 쫑이만 꼬리를 흔들어주고 조그만 양품점을 하는 아내는 밤 10시가 넘어야만 장사를 마치고 들어왔다. 때로는 늦은 시간에 찜질방에 가서 사우나를 하고 온다면서 자정이 넘어서 귀가하는 일이 더 많다 보니 부부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운영하는 조그만 인터넷 영업이 끝나는 저녁 시간 퇴근 후의 긴 시간을 혼자 집에서 보내는 일이 지루할 수밖에…. 대기업을 근무하다 I.M.F때 명퇴한 이후 뚜렷한 직업 없이 이것저것 해 보다가 지금 하는 인터넷 판매사업이 썩 잘 되어 바쁘면 좋겠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것도 쉬운 것만은 아니다 보니 서서히 주위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숙이라는 여자 친구와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사십 대 중반에 만난 남녀가 무슨 친구 관계냐고 남들은 말하겠지만, 우연히 알게 된 숙이와 수다 아닌 수다를 매일 밤 떨면서 가끔 술친구도 돼 주는 심심찮게 지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그런 천석과 숙이는 처음에야 남녀 간에 서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야릇한 감정이 생기면서 문자도 수시로 보내고 전화도 시간 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걸었지만,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보니 어떠한 기준을 서로 정해 놓고 그 선을 초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성 친구이면서도 편안한 사이로 더 이상 진전해 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사이로 굳어버렸다.
숙이 역시 동분서주 바쁜 남편이 자주 새벽녘에야 들어오니 이제는 귀가 시간 체크도 포기한 지 오래, 큰 아이인 딸은 지방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둘째인 고등학생 아들은 매일 학원에서 밤늦게 귀가를 하니 밤마다 천석과 미주알고주알 이웃집 사는 아낙처럼 수다를 떨며 무료함도 달래고 가끔 술도 함께 마시면서 동성 친구처럼 편안한 사이로 익숙해 가고 있었다. 숙이에게는 독신녀로 사는 먼 친척뻘 되는 은실이라는 여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마흔 살까지 혼자 살면서 숙이를 친언니 이상으로 의지하면서 항상 모든 일상을 털어놓고 지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을까? 천석이 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에서 은실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숙이는 은실이 집에 놀러 갔다가 천석이 전화를 받게 되었고, 오히려 감추려다 보면 더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천석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은실에게 천석과 만남부터 현재까지 그저 친구로만 지내는 사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은실은 천석이 궁금하였고 가까이 산다는 말에 그럼 천석을 자기 집으로 불러서 함께 식사도 하고 술 한잔 하자고 하였다. 천석은 퇴근하자마자 은실의 집으로 달려왔고, 그날 이후 세 사람은 종종 함께 만나면서 쓸쓸함을 공유한 삼총사처럼 서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언니, 우리 가을 바다에 가보자, 찬 바람 불기 시작하니 가슴이 휑하니 쓸쓸해지네. 바닷가에 가서 싱싱한 회도 사 먹고 바람 좀 쐬고 오자."
은실은 숙이를 졸라 가을 바다를 가자고 하였다. 숙이 역시 은실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지루한 여름 끝에 부는 소솔 한 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면 숙이 역시 첫사랑과 아련한 추억들로 가슴 한구석이 시리는 건 세월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은실아, 그럼 우리 천석 오빠를 데리고 가면 어떨까? 오빠 데리고 가면 더 재밌을 거야. 그리고 운전도 오빠에게 하라고 하면 되잖아."
" 어, 맞다 언니, 그러면 되겠다. 당장 오빠에게 전화해서 얼른 약속을 받아 놔. 다음 주 토요일에 가는 거로 해. 알았지?"
그렇게 하여 쓸쓸한 세 사람은 연포의 작은 포구에 도착하여 바다가 보이는 창 넓은 횟집에 앉아서 쫄깃하고 싱싱한 회와 함께 소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숙이는 운전을 할 생각에 술을 마시지 않고 두 사람의 흥을 맞추는 농담 속에서 삼십 년 전 추억 속의 첫사랑과 연포항에서 있었던 가물거리는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은실과 천석은 숙이의 쓸쓸한 추억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잔을 “짠짠” 부딪치며 즐거운 분위기에 무르익어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함께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비교적 작은 포구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연포항이지만 밤바다의 풍경은 어느 항구 못지않은 아름다운 곳이었고, 세 사람의 마음을 아는 듯이 파도마저 흥을 돋우듯 철썩댔다. 은실은 구두를 벗어 들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모래밭에 누워 밤하늘 별빛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옛사랑을 떠올리며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면서 김범수의 ‘보고 싶다’ 노래를 음정 박자 무시하고 큰소리로 블렀다. 은실은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을 때마다 ‘보고 싶다’가 보고 싶다하곤 한다. 한때 멋진 로맨스 기억 속 지울 수 없는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람 이름이 뭔지는 모르지만 ‘보고 싶다’로만 말하곤 한다. 그 "보고 싶다"가 왜 하필 술 취한 연포 바닷가 밤 풍경에서 더 아른거리는지, 은실은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옷을 적시면서 마냥 어린아이처럼 소리치며 좋아하였다. 물론 천석과 숙이 앞에서 그다지 체면 차릴 사람들도 아니지만, 그래도 천석을 언니의 남자 친구로 생각하여 조금은 예의를 갖춘다고 내숭을 떨 만도 하겠지만 은실의 성격상 그런 내숭과는 거리가 멀고 솔직한 편이었다. 천석은 은실이 걱정되어 뒤 따라다니면서 보호 본능을 발휘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숙이는 어차피 두 사람 다 허물없는 사람들이니 설마 어떤 일이 일어날 일이야 있겠냐 싶어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은 파도를 따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면서 숙이가 앉아있는 모래밭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숙이는 30년 전에 함께 왔었던 첫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밤바다의 풍경에 푹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캄캄하여서 일정 거리 이상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한편 은실과 천석은 숙이를 잊은 채 파도가 철썩이는 바위 위에 걸터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바짓가랑이를 내리며 모래를 털려하니 자상하고 꼼꼼한 천석이 얼른 은실의 바짓가랑이를 털어주었다. 언니의 남자 친구이지만 술기운에 알딸딸해진 은실은 "보고 싶다"가 그립기도 하고 오랜만에 밤바다의 야경에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하였다.
"오빠, 나 한 번만 안아줘."
"어떻게 하지? 언니가 나 좋아하는데, … 그러면 안되잖아."
"뭐가 어때, 괜찮아 오빠, 한 번만 안아 줘 봐."
열 살이나 아래인 은실의 애교와 술을 취해 흘러나오는 콧소리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천석은 은실을 꼭 껴안아 주고 등을 다독이고 있었다. 어느새 은실의 입술이 천석의 입술에 뜨겁게 와닿았다. 얼마 만인가, 아내를 안아본 지도 오래 던 차, 외로움이 밀려오는 밤바다의 출렁임과 파도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호흡은 빨라지면서 잠시 서로의 처지를 잊은 채 뜨겁게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멀리서 두 사람을 찾고 있을 숙이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참 동안 달콤한 키스를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숙이 생각이 났던지 헐레벌떡 숙이가 있는 모래밭으로 갔다. 둘은 태연스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숙이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고, 숙이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오빠, 맥주 한 병 더 마실까? 갈증도 나는데, 오빠가 가서 사 오면 좋겠는데…"
은실은 숙이를 보자 미안한지 얼른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 설레발을 쳤다. 그러자 천석은 근처 가게로 잽싸게 달려가서 맥주와 오징어를 사 들고 왔다. 어차피 밤도 늦었고, 두 사람이 많이 취해있는 상태라서 다음 날 갈 생각으로 숙이도 함께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밤바다는 마술사 마냥 세 사람 마음을 각기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하였다. 숙이는 첫사랑을, 은실은 ‘보고 싶다’를, 천석 역시 외로워서 몇 년 전에 이틀 밤을 새워서 기다리다 허탕 친 적이 있는 첫사랑을 떠올렸다.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다가 사십 중반에 갑자기 보고 싶어서 찾았지만 얼굴도 못 보고 돌아온 쓸쓸한 상태에 숙이를 만나 가깝게 지내면서도 어떤 연인의 감정으로는 진행하지 못하던 차, 은실과 함께 밤바다에서 뜻하지 않은 추억을 숙이 몰래 갖게 되었으니 마음이 혼란스럽기 시작하였다.
은실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숙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큰 실망을 할 것인가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혼자 사는 은실과 함께 어떤 로맨스를 만들고 싶은 욕망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오빠, 우리 저쪽 끝에 한번 가보자, 거기 불빛이 반짝거리는데, 그게 뭘까?"
은실과 천석은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 다시 사라졌다. 숙이는 빈 병과 쓰레기를 담은 검정 비닐봉지를 버리고 돌아오니 두 사람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오겠지 하면서 다시 모래밭에 앉아 수평선 너무 반짝거리는 작은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두 사람은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바다 양쪽 끝을 두리번거리면서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쪽 멀리서 희미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어른거렸다. 분명히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설마설마 그럴 일이야 있을라고 하면서도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선뜻 그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면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는 눈앞의 광경을 보면서 모른 척하려다 혹시 방관하다 더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숙이를 의식했는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어오더니 숙이 옆에 앉았다. 이미 술에 취해서 이성이 흐려져 가는 은실은 천석이 뒤에 앉아서 천석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숙이는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을 놔두고 일어서서 모래밭을 걸어 나왔다. 그때서야 눈치를 챈 천석은 은실의 손을 떼 놓고 숙이를 따라왔다. 은실은 갑자기 숙이 곁으로 가는 천석에게 서운함을 느꼈던지 술기운에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숙이는 은실이 그동안 얼마나 쓸쓸했으면 연포 바닷가에 와서 자기 남자 친구에게 그런 감정을 가졌을까 하는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그대로 두 사람을 묵인해 주고도 싶었다. 어차피 천석 역시 쓸쓸한 사람이고 두 사람 집이 가깝고 하니 사귀도록 해 줄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지만, 사실 1년 넘도록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일상을 주고받던 천석을 은실에게 연결해 주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묘해가는 걸 그대로 지켜봐야 할지 여기서 단칼에 잘라주어야 할지 갈등이 일었다.
세 사람은 밤도 늦었고, 일단 숙소를 잡아서 함께 잠을 잔 후 다음날 출발하기로 하였다. 숙소에 들어왔을 때, 은실과 천석은 많이 취해있었고, 숙이는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아서 맨 정신으로 또랑또랑한 상태였는데, 숙이가 욕실에 먼저 들어가 씻고 나왔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천석은 겉옷을 벗고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은실 곁에 가서 나란히 눕는 게 아닌가? 어이없기도 하고 그냥 그대로 놔두자니 다음 날 아침에 서로 민망스러운 꼴로 대할 일에 우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박천석 씨, 이리 좀 와봐. 당장 일어나서 나하고 얘기 좀 해요."
숙이의 칼날 같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천석은 옷을 주섬주섬 입고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 있는 승용차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은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술기운에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사람이 왜 그런가요? 나, 천석 씨에게 대실망이네요, 어떻게 내 앞에서 은실에게 그럴 수가 있어요?"
술이 조금씩 깨기 시작한 천석은 숙이의 호통에 정신이 바짝 들었는지 할 말을 잃고 앉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훌쩍이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뭣에 홀려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싶기도 하고, 여자 둘과 함께 밤바다에 와서 감정 정리를 못하고 끌려다닌 자신이 한심스러웠던지, 당장 혼자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니 몇 시간 후 같이 가자고 숙이가 훌쩍이는 천석을 달랬다. 그 시각에 서울까지 돌아간다는 게 사실 까마득하였다. 그저 미안하다 말할 뿐, 더 이상 숙이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거조차 민망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해장국을 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취중에 있었던 행동들이지만, 숙이는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은실과도 서먹해지려 하는데, 은실은 전혀 술 마시고 있었던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하였다. 물론 천석은 그 일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날 이후로 숙이에게 전화도 전처럼 하지 못하고 근신 중이었다. 며칠 지난 후, 세 사람은 어색함을 씻을 겸 다시 은실의 집에서 만났다. 술김에 그럴 수도 있다고 숙이의 생각을 바꾸자 아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뭉쳐서 화해의 시간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셋이서 식사를 하고 깔깔대면서 술잔을 오갔다. 숙이는 물론 은실의 집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이라 아예 입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천석의 차를 빌려서 늦은 시간에 천석을 집 앞에 내려주고 숙이의 집으로 왔다.
다음 날 아침, 숙이는 아무 생각 없이 여느 때처럼 은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언니, 잠깐만…, 내가 좀 이따 다시 걸게."
은실은 눈을 뜨자마자 숙이의 전화를 받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당황스러워서 일단 전화를 끊고서 고민을 하였다. 잠시 후 은실이 숙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실은 어어 언니. 여기에 지금 천석 오빠가 있어. 어젯밤에 집 열쇠가 없어서 우리 집에 와서 잠을 잤어."
천석은 집으로 가서야 열쇠가 숙이의 차 안에 있음을 알고 숙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숙이는 운전 중에는 아예 전화를 받지 못하고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여섯 번이나 계속 걸어서 벨 소리가 울렸지만 깜깜무소식이니, 결국 천석은 은실의 집으로 되돌아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였다. 그동안 은실은 한숨 잠을 자고 나서 술이 좀 깬 상태였는데, 그 시간에 돌아가서 자라고 하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은실아, 나와 함께 오늘 밤 잠자면 안 될까?, 언니에게는 비밀로 하고 말이야,”
"그건 안 돼요, 오빠, 그냥 저 방에 가서 주무세요."
"그럼 한 번만 안아보게 해 줘."
은실은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는 천석의 청까지 거절할 수가 없어서 살짝 천석의 품 안에 안겨주었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닷가에서의 기억은 까마득한 함께 잠을 자자고 청하는 천석이 자기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상태였고, 천석은 더 이상 은실을 조르지 못한 채, 건넌방에서 조용히 잠이 들려하였지만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은실과 몰래 만들고 싶었던 비밀은 아예 만들지도 못 한 채, 두 여인의 틈새에서 혼란스러움만 커가고 어정쩡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바를 몰랐다.
" 언니, 글쎄, 날 더러 오빠가 비밀 만들잔다. 언니에게 말하지 말고 단둘이서 산에도 가자고 하였어. 하하하. 내가 그럴 사람이야, 언니, 정말 웃기지?, 저 오빠 정말 되게 순진하다. 나는 정말로 연포에서 천석 오빠가 ‘보고 싶다’ 그 사람인 줄 알았단 말이야. "
은실은 여느 때처럼 쫑알쫑알 숙이에게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떠들어댔다. 천석은 그래도 은실이 자기와 비밀을 만들면 그 비밀만은 지켜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은실의 성격을 잘 파악하지 못한 천석의 실수였다
그날 이후로 천석은 일 년 넘도록 매일 전화 수다를 떨던 숙이마저 대하기가 민망스러웠다. 연포 항의 달콤한 추억을 서울의 한강으로 흘려버리고 쓸쓸한 가을 고독남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 사랑했다, 사랑했다, 우린 미치도록 사랑했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숙이의 컬러링 노래까지 천석의 가슴을 후벼 팠다. 깊어가는 가을밤, 쓸쓸함을 달래고 싶어 전처럼 숙이와 수다를 떨고 싶은데 도대체 숙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보세요, 예. 오빠,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
천석은 산악회 모임에서 술 한잔 마시고 돌아왔지만, 집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너무 허전하여서 여느 때와 같이 숙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숙이가 전화를 안 받자 은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은실이 동생, 나 술 마셨는데, 지금 너무 심심해, 나랑 전화로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 싫어요, 오빠, 지금 너무 늦었잖아요." 찰카닥..
은실은 밤늦게 전화를 건 천석에게 부드럽게 대해 줄 수도 있었지만,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천석의 고리를 잘라주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여느 때처럼 은실은 숙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언니, 글쎄 어젯밤에 천석 오빠가 나에게 전화를 또 걸었잖아, 그래서 내가 늦었다고 하고 잘라버렸어.”
" 그러지 말고 좀 부드럽게 대해주지 그랬어. 너도 참."
" 그러면 매일 밤 나에게 심심하면 전화하여 수다 떨자고 할 거 아냐, 귀찮게 할까 봐 그랬지. “
아직도 두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천석의 허전한 가슴앓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말에도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마누라는 올 기미가 없고, 쫑이만 꼬리를 흔들어대며 천석의 주위를 맴돈다.
*****(2005년도 문학지 발표 )
하루살이의 비행 (사진: 한상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