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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가람 Jan 15. 2024

#단상 2. '끝'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순간

유한(有限)하다는 것에 목이 메인 순간이었다.


끝이 정해져있음을 알지만, 그 끝이 어디에 있는 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득히 멀기만 한 탓에

체감하지 못하고 지냈다.

'언젠가' 라는 단어는 '끝' 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라는 생각으로 하루 하루 오직 사는 것에

집중한 채 살고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기다리든 아니든 언젠가 '끝'은 올테고, 그 '끝'이 올때쯤이면 여태껏 그랬듯

자연스럽게 그 '끝'을 맞이할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슬픔과 공포를

상쇄(相殺)하고 있었던 듯하다.


생각해보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에 '끝'은 여러번 있었다.

그 '끝'에 섰던 순간을 떠올릴때면,

어느 날엔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이 아프기도, 또 어떤 날엔 아무렇지도 않은듯 평소보다 비싼 음식을

시켜 맛있게 먹기도 했다.

'끝'은 언제나 동일했지만 그 '유한함'을 맞이하는 내 자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달랐던 것이다.

"세상에 슬프지 않은 '끝'도 있는 거야, 익숙한 것들이 끝났을 땐 원래 슬프거나 아픈 게 아니고,

단지 허전한 것일 뿐이야" 라며 슬프지 않은 '끝'을 맞이한 당황감을 스스로에게 숨기기도 했었다.


아프거나 슬프지  않은 '끝'

그  '끝'의 양 극단에 선 나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무미건조한 '끝'은  상대에 대한 왠지 모를

미안함마저 들게했다.

'끝'을 마주하기까지 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이 '끝'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혹은, 난 점점 싸이코 패스 혹은 소시오 패스가 되어 가는 중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던

어느날엔, 정말 난 이대로 괜찮은 건지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핑계로, '끝'을 자주 경험한 탓이라는 핑계로 딱딱하게 굳어가는 내 심장을 향해

어쩌면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는 긍정의 도파민을 마구 분출하려 노력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유한하다는 것에 갑자기 목이 메인 어느 날은, 거대하고 동그란, 붉은 '놀'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곧 있으면 사라질 것이 어떻게 저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선 채로, 사라져가는 '놀'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연신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목을 따라 끝도 없는 그리움이 흘러내렸다.

아무렇지 않았던 '끝'이 더이상 아무렇지 않은 '끝'이 아니게 된 순간이었다.


이내 '놀'이 지난 자리엔 어둠만이 가득하다.

한참을 흘려버린 그리움이 있던 자리엔,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아 빈공기만 빠지듯 연신 한숨만 내뱉고 있다.


'끝'은 여전히 아픈 것이었고, 나는 그 아픔에 단단해져간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난 그 아픔을 여전히 마주할 용기가 부족했을 뿐이었다.


그 용기가 생기는 날은.... 정말이지 '끝'을 '끝'으로 인정하는 날일테다.




하루의 기억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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